종로 번화가 바로 인근에 남몰래 자리
구세군이 운영…2018년부터 시립 전환
1평 밖에서 삶의 즐거움 찾도록 도와
서울의 화려함 아래 감춰진 비밀스런 공간 ‘쪽방’. 들어본 사람은 많지만 정작 쪽방에 직접 발을 들여 봤거나 실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흔히 남대문과 서울역, 창신동, 영등포가 쪽방촌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돈의동이다. 종로3가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옛 피카디리 극장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돈의동 쪽방촌이 자리하고 있다. 85개 동의 건물에 빽빽하게 나눠진 737개의 쪽방들은 서울에서 가장 열악한 주거지임이 분명하다.
처음 돈의동 쪽방촌에 발을 들였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스마트폰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따라 목적지로 향하는 중에 마주한 골목길. 지면과 맞닿아 비라도 내리면 언제든지 물이 넘실거릴 것 같은 낮은 현관문들과 2~3층의 날카로운 쇠창살, 골목 가득한 담배 연기와 러닝셔츠 바람의 남자들. 느와르 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한여름에도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큰 길을 찾아 서둘러 발길을 옮기는데 골목 끝자락에 아기자기한 협소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골목의 풍경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파스텔톤 건물에는 ‘새뜰집 돈의동 주민공동시설’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또 한편에 자리한 ‘구세군’ 마크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뭔가에 홀린 듯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섰다.
상담소에서 만난 따뜻함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서울특별시립 돈의동 쪽방상담소다. 지난 2018년 2월부터 대한구세군유지재단법인이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원래는 2003년 골목 안쪽에 작은 공간으로 문을 열었는데 6년 후인 2009년 구세군이 운영 법인을 받았고, 2018년 시립으로 전환한 뒤 1년 만에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이 지금의 새뜰집이 됐다. 이곳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상담과 편의서비스 지원, 생활환경 개선, 생활필수품 지원, 안전, 의료, 자립 지원, 프로그램 운영 등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1층에는 주민공동 휴게실, 2층에는 세탁기와 샤워실, 3층에는 의무실과 상담실, 4층에는 프로그램실, 5층에는 공동 주방과 옥상주방이 자리하고 있다. 협소주택 방식으로 지어지다보니 각종 시설이 층별로 분산돼 있다. 유명 건축가인 조정구 씨가 설계한 건물답게 산만한 느낌보다는 가지런히 정돈된 느낌이 안정감을 더한다. 건물 특유의 느낌 외에도 인상적인 것은 벽 곳곳에 전시된 캘리그라피 작품들.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누군가에게 꽃향기처럼 은은한 기쁨이고 싶다’, ‘우리 꽃길만 걸어요’, ‘세상의 비바람과 찬이슬 다 맞으면서도 마치 아무 일 아닌 듯 배시시 웃는 들꽃되리라’ 등의 문구를 따라가다 보니 마음속에 절로 따뜻한 기운이 스민다. 골목에서 처음 마주했던 으스스한 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곳의 운영비전이 ‘더불어 행복한 삶의 터전 만들기’라는데, 쪽방 주민들이 썼다는 캘리그라피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캘리그라피 동아리 외에도 ‘손끝으로 잇는 한마당’이라고 해서 손뜨개질을 함께하기도 하고 석고 방향제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 사진동아리 ‘동네 사진관’은 추운 겨울을 빼면 매월 한 차례 출사를 나가는데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다.
어둠의 굴레 벗어나도록
돈의동 쪽방상담소는 지난 2015년 지역발전위위원회와 국토교통부 주관 공모사업인 ‘새뜰마을’로 선정되어 지역 생활환경 개선 및 주민 삶의 질 향상에도 큰 기여를 했다. 새뜰마을은 전후 좌우로 딸려있는 빈터를 새롭게 가꾸어 나간다는 뜻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진행된 사업이었다. 돈의동 쪽방상담소는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성과를 거둬 성공사례로 뽑히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불미스러운 일로 좌초됐지만, 당시 진행된 사업을 통해 쪽방촌 주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다.
앞서 언급한 동아리활동 외에도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공연이나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밖에 교육 프로그램으로 생활용품 만들기와 한글교실, 체조, 떡 만들기, 마을 합창단 사업 등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돈의동 주민 장00 어르신(70세, 남)은 “주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도 전에는 다른 곳에서 눈치를 보면서 했는데 이제는 눈치도 안보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좋다”며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많이 배울 뿐 아니라 주민들 간에 ‘형 동생’을 맺고 친목을 나누면서 혼자 있을 때 생기는 우울함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진동아리로 활동한 남00 어르신(60대, 여)은 “약 4년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사진 찍으러 다니고 찍은 사진을 보며 이웃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주위의 사물과 풍경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감사를 전했다. 돈의동 쪽방상담소의 최선관 실장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은 무언가를 강제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오셔야만 프로그램이 가능하지요. 본인들이 원해서 참여한 것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응도가 높고, 캘리그라피 사례처럼 전시와 판매로 이어지는 사례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복지를 넘어 복음으로
과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노숙인 인식개선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최 실장은 이런 프로그램들이 쪽방촌 주민들 스스로에게뿐 아니라 대사회적 이미지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상담소 안에 전시된 각종 작품들을 관람한 이들 대부분이 쪽방촌 주민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감상을 전하고 간다는 것. 최 실장은 “노숙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문화”라며 “내적인 변화, 더 나아가 결론은 복음에 이를 때 우리가 하는 이런 노력들이 진정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본 흥미로운 풍경 하나를 소개했다. 매년 여름이면 저녁 어스름에 누구는 소주 몇 병, 누구는 안주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나와 바닥에 종이박스를 깔고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김 씨 이리 와” 하며 불러서 안부를 묻고 누구나 올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 퍽 정겨웠다는 것.
“가끔 치고 박고 다투기는 하지만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납니다. 여기에 복음만 들어가면 이게 코이노니아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쪽방 상담소는 서울시 위탁 시설이긴 하지만 구세군이 운영하는 곳인 만큼 단순히 복지 혜택을 주는 것으로만 사역을 멈추지 않는다. 구세군이 내세우는 표어처럼 ‘한 손에는 복음,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수혜자들이 결국엔 복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가 필수적이다. 인근의 초동교회에서 나와 격주로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자체적으로 예배모임을 세워나가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예배를 위한 준비를 마친 시점에서 코로나가 발생해 본격적인 시작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감사할 거리는 많다. 주민들과 함께 볼 교재를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최근 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회장:김진덕 목사)에서 신앙 교재 ‘새가정’을 매월 50권 씩 지원해주기로 한 것.
최 실장은 “목회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곳에 왔다고 확신한다”며 “예배가 잘 자리 잡아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