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와 잇단 결별로 상처입은 대신총회, ‘통합’으로 돌파구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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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와 잇단 결별로 상처입은 대신총회, ‘통합’으로 돌파구 찾아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0.04.07 00: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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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통합의 역사를 통해 본 백석의 미래 - (2) 왜 대신에 ‘교단 통합’이 필요했을까?

안양대학교 사유화로 교단 모태인 ‘대한신학교’ 전통 잃어버려
총회 부채와 신학교 갈등으로 내홍 일던 90년대부터 통합 추진
합동정통과 통합 추진했지만 최종 무산, 이후 개혁과 통합 논의
백석대 전신인 방배동 총신 교사 신축 당시 모습. 백석총회는 신학교와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백석대 전신인 방배동 총신 교사 신축 당시 모습. 백석총회는 신학교와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2015년 9월 전격적으로 이뤄진 예장 백석과 대신의 통합은 양 교단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조합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양 교단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는 “우리 합치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2015년 통합 이전에 양 교단의 통합이 논의된 횟수만도 3~4번에 이른다. 통합 목전에서 무산된 적도 두 차례나 있다. 오랜 시간 통합을 논의할 만큼 양 교단은 가깝다. 그 배경엔 ‘신학’이 있다. 

1976년 설립된 백석대학교 전신인 ‘총회신학교’는, 대한신학교 출신인 장종현 총회장이 씨앗을 뿌려 토대를 놓았다. 그로부터 5년 후 김치선 목사의 사위이자 신학적 적통으로 불리는 최순직 목사, 김치선 목사의 제자인 김준삼 박사 등이 방배동에 합류했다. 사실상 대한신학교의 주류 신학자들이 방배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대한신학교의 변질을 목격한 두 학자는 방배동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신학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방배동 총신의 설립 목적이 개혁주의신학을 잘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방배동 총회신학교는 나날이 성장을 거듭했다. 장종현 목사가 천명한 설립정신을 바탕으로 기독교인재 배출에 힘쓴 결과, 불과 4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학생 수 3만 명 규모의 종합대학교인 백석대학교가 세워졌고, 백석신대원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정체성으로 하는 정통보수신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예장 대신은 김치선 목사의 아들인 김세창 목사가 신학교를 이어받은 후 지금의 안양대학교가 되기까지 수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총회 역시 신학교 문제와 총회 부채 등으로 인해 수십년 간 집안싸움이 심화됐다. 대신총회 안에서는 “우리 스스로 총회를 지켜내고 신학교를 살려내자”는 교단 수호세력과 “다른 교단과 통합해서 활로를 찾자”는 통합 지지세력이 오랜 시간 대치했다. 한 총회 안에 사실상 2개의 계파가 주도권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갈등은 점점 커지고, 상처는 깊어졌다. 

그래서 대신 측 한 인사는 2015년 당시 상황에 대해 “백석과 통합하지 않았어도 갈라설 수밖에 없는 갈등의 최고조에 있었다”며 “대신의 분열이 백석과의 통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분열 직전에 한쪽이 백석과 손을 잡은 것”이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대신총회 원래 명칭은 ‘성경총회’
이쯤에서 대신총회의 역사를 간략히 돌아보자. 

예장 대신총회의 원래 명칭은 ‘예장 성경장로회’였다. 초대 총회장은 김치선 목사다. 김치선 목사는 남대문교회 담임 시절인 1948년 야간장로교신학원을 설립했다. 이 학교는 1952년 대한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그리고 신학교를 바탕으로 1961년 대신총회 전신인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회장에 피선된다. 대신총회의 출발은 근본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근본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ICCC(국제기독교협의회)가 대신총회 창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고 김재규 목사가 쓴 ‘최순직 목사와 예장(대신) 교단’에 따르면 “5.16 군사쿠테타에 의한 대한신학의 입지가 좁아짐으로 마두원과 손잡고 1961년 성경장로회총회가 설립”됐다. 마두원은 ICCC 파송 선교사였다. ICCC는 1948년 태동한 WCC에 반대하여 생겨난 단체다. 그래서 대신총회를 ‘근본주의 보수교단’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신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8년 대신은 ICCC를 탈퇴했고, 1969년 교단 명칭을 성경총회에서 성장측으로 바꿨다. 이때 첫 분열이 생겨났다. ICCC 문제로 몇몇 교회들이 이탈한 것. 1961년 교단 창립과 함께 시작된 근본주의 시대는 1967년 막을 내렸다. 

현재 대신이라는 이름은 1972년 제7회 총회에서 확정됐다. 당시 총회장은 최순직 목사였다. 대신이라는 총회 이름을 갖기까지 ‘성경-성장-대신’으로 3차례 변경이 있었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을 좌우하는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 앞에 통합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이라는 이름이 보존되지 않았다고 해서 굳이 통합을 깨고 뛰쳐나갈 일인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신학교 지켜내지 못한 후유증 커
김치선 목사 사후 대신총회의 신학교인 대한신학교는 아들인 김세창 목사가 운영했다. 이후 대한신학교는 ‘역사적 개혁신학 노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외형적으로는 1987년 안양대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4년제 종합대학교로 확대됐지만 이미 개인에게 넘어간 학교는 총회와 멀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대신총회는 자체적인 교단신학교를 갖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게 된다. 1996년 학교법인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1998년 1월 M.Div. 과정을 개설했지만 갈등 끝에 4년 만인 2002년 대신교단과 결별했다. 그리고 총회는 직영신학교로 대신총회신학을 다시 설립한다. 안양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등 정규 인가를 받은 2개의 대학은 대신총회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교단 신학교를 지켜내지 못한 대신총회는 어떠한 돌파구를 찾았을까? 정답은 바로 ‘교단 통합’이었다. 

1980년대 초반, 최순직 목사가 백석에 몸을 담은 직후 대신과 통합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명절마다 찾아오는 대한신학교 제자들이 “합치자”는 뜻을 내비쳤다. 김준삼 목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합치고 싶은 이유는 ‘신학교’였다. 교단의 모태가 됐던 안양대학교(구 대한신학교)의 사유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와의 결별 등은 대신측 목회자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갈등의 돌파구로 ‘통합’ 추진 나서
대신총회의 첫 통합추진은 갈라져 나간 예장 성장측과의 결합이었다. 1994년 예장 대신은 제29회 총회에서 성장측과의 통합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성장측은 달랐다. 통합추진이 부결됐다. 결과적으로 통합에 찬성한 일부 성장측 인사들이 대신총회에 합류하는 것으로 끝났다. 
두 번째 통합추진은 1999년 백석의 전신인 합동정통과의 통합이었다. 당시 합동정통 총회장은 최낙중 목사였다. 통합추진위 보고에 의하면 합의된 교단 명칭은 ‘대신정통’이었고, 신학교는 방배동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통합하여 총회 직영신학교로 둔다는 것이었다. 

본지 제560호 1999년 10월 3일자 신문에는 양 교단 총회 결과가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합동정통총회 - “합동정통 84차 총회는 ‘성총회’란 이름에 걸맞게 시종일관 ‘아멘과 할렐루야’, ‘웃음과 박수소리’ 가운데 진행됐다.… 올 총회의 가장 큰 이슈로 꼽혔던 대신측과의 ‘통합안’이 대두…<중략>…찬성과 신중론 사이 한바탕 설전을 치루고 난 뒤 ‘9인 전권위원회’에 맡겨 통합을 추진키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대신총회 - “예장대신총회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예장합동정통과의 교단통합 문제였다. 합동정통이 교단 통합안을 총회 둘째 날 만장일치로 결의한 반면 대신총회는 마지막 날까지 이 안건을 미뤄서 처리,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 2시간 넘는 찬반토론이 장내를 뜨겁게 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제시한 총대들의 입장도 결국 ‘통합을 반대하지는 않는다’였다.… 일부에서는 통합에 따라 대신교단이 분열을 겪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소리도 나왔지만 결국 표결에 붙여져 교단통합을 위한 9인 전권위 구성을 결의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양 교단의 총회 상황이다. 하지만 마치 지난 2015년 백석과 대신의 통합을 보는듯한 분위기다. 백석은 은혜 가운데 만장일치로 통합을 결정한 반면, 대신은 여전한 반대와 ‘교단분열’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이듬해 총회에서 9인위원회가 1년 동안 노력한 통합추진은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무산됐다. ‘대신정통’으로 시작된 통합논의는 교단 명칭을 ‘대신’으로 해야 한다는 대신총회의 일방적인 주장에 부딪혔고, 대신 내부에서 총회와 신학교 갈등이 불거지면서 집안싸움을 말리는 일이 더 시급했다. 

누구와 통합해도 갈라질 운명?
합동정통과 통합을 끝내 무산시킨 대신은 2년 후인 2002년, 이번에는 개혁 광주측(당시 총회장 윤낙중 목사)과 통합을 추진한다. 이 역시 1년간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했지만 결과는 불발이었다. 이미 대신총회는 총회측과 학교측으로 나뉘어져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었고, 다른 교단과의 통합은 ‘대신의 분열’을 의미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2003년 9월 28일자 본지 기사는 당시 예장 대신 총회가 개혁과 통합을 유보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번 총회는 애초 교단 합동 그룹이 반대그룹보다 여론이 클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총회분위기는 교단합동 반대여론이 비슷한 형세를 보여 유보결정을 이끌어 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예상보다 교단합동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교단 합동을 반대하던 소장그룹이 총회분리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실이 조심스럽게 총회 안팎으로 퍼지면서부터다.” 

결과적으로 대신총회의 분열은,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내부에서 생겨난 균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대신 수호측 관계자는 “아마 백석이 아닌 다른 교단과 통합을 했어도 우리는 남았을 것이다. ‘우리 손으로 교단을 지키자’는 수호그룹은 통합지지 그룹과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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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20-04-09 12:1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