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오덕 선생님의 저서 ‘우리글 바로쓰기’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우리 글과 언어의 소중함을 강조할 때, 우리 삶에 깊게 침투한 외래어를 경계하는 걸 종종 봅니다. 그러면서 한자어에 대한 경계심은 비교적 느슨한 걸 봅니다. (물론, 한자어도 외래어입니다만) 사실 한자어는, 이것을 제외하곤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 삶에 깊게 스며들어 온 단어는 맞습니다. 그렇지만 한자어의 잦은 사용은 글을 차갑고 딱딱하게 만들며, 가독성 또한 떨어지게 만듭니다. 아주 짧은 예를 하나 볼까요?
‘고등학교 입학 직후, 관내 교육청에 찾아갔다.’
->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그 지역에 있는 교육청에 찾아갔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 비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다.
두 문장의 온도차가 확연히 드러나지요? 아랫문장이 훨씬 부드럽고 쉽게 읽힙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한자어를 쓰는 걸까요? 한자어는 더 학술적이고 고급적이고 격식을 갖춘 언어라고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저도 여기까지 글을 쓰며, 나도 모르게 한자어로 쓴 단어를 몇 번이나 수정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언어 안에 남아 있는 사대주의 내지는 엘리트주의라고 본다면 좀 과장된 결론일까요? 어쨌든 우리가 우리의 메시지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길 원한다면 한자어보다는 우리말을 최대한 찾아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쉬운 단어를 쓴다면 내가 얕잡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자꾸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언어를 통해 낮아짐을 실천한다 생각하면 어떨까요?
물론, 아까 이야기하고 저도 경험했듯이 이미 한자어가 우리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기에, 대체어를 찾는다는 것이 쉽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자어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내가 쓴 단어를 한 번 더 고민하고, 훑어보기 시작한다면, 분명 한자어로부터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우리가 자주 쓰지만 대체 가능한 한자어 몇 가지를 더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모되는 -> 닳아 없어지는
무산되다 -> 못하게 되다
저의 -> 속셈
타부서 인원 -> 다른 부서 사람
소모임 -> 작은 모임 (저희 교회도 이번 주부터 바꾸려고 합니다)
이견 -> 다른 생각
필히 -> 반드시
공조 -> 함께 도움
추계, 춘계 -> 가을철, 봄철
상식적으로, 기본적으로 -> 상식으로, 기본으로 (불필요한 ‘적’은 중국식 표현입니다)
(더불어 아쉬운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요약하는 주요 단어에도 한자어가 지나치게 많은 걸 봅니다. ‘전가’, ’성육신’, ‘임재’ 특히 ‘구속’ 같은 경우는 ‘Arrest’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지요. 저는 이것이 오늘날, 교인과 교리 사이를 벌리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