㉛저항시인 윤동주
세계관 기초 이룬 탄탄한 기독교 신앙…작품에 반영
유학시절 사촌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죄로 투옥
정부, 1990년 광복절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시인 윤동주, 그는 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가였다.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애썼던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신앙의 선배다.
더불어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살아생전 자신의 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될 것을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유난히도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 했던 그가 오늘날 한국사회와 교회를 본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시인의 발자취와 그가 남긴 작품을 더듬으며 짐작해봤다.
명동촌에서 태어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면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이었고 교회와 학교가 마을의 중심축을 이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탓에 윤동주 역시 심성 깊은 곳에서부터 기독교가 탄탄한 토대를 이뤘다.
그는 1932년 사촌인 송몽규, 동창 문익환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이때부터 아명인 해환 대신 ‘동주’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학교 축구선수로 뛰는 등 활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는 교내 잡지를 만들었고, 웅변대회에도 나가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3년 사촌 송몽규가 중국으로 떠나자 문익환과 더불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한다. 은진중학교 4학년이던 그는 뜻하지 않게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지만 당시의 좌절감은 그로 하여금 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게 했다. 이듬해 4월까지 무려 15편의 시를 썼는데 숭실중학교 학생청년회가 발행하던 숭실활천에는 그가 쓴 ‘공상’이 실리기도 했다. 이 시는 그가 쓴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다.
당시 그는 정지용의 시에 심취했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시절 동경하던 정지용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정지용은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라는 말을 건넨다.
윤동주와 정지용은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학자들은 이 대화가 그의 인생과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 혹자는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윤동주를 대표하는 정서라고 꼽기도 한다.
민족현실에 눈을 뜨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그곳에서 민족현실에 눈을 뜬다. 조선어 강의와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한다. 연희전문 1,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려 누이와 동생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 기미독립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졸업을 앞둔 1941년 그는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한다. ‘무서운 시간’, ‘간판 없는 거리’ 등의 시가 이때 나왔다. 그해 11월 그는 자신의 시 가운데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엮는다. 3권을 필사하여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에게, 나머지 1부는 출판을 위해 이영하 교수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일제의 검열과 신변의 위험을 이유로 출판을 보류할 것을 권한다. 결국 이 책은 해방 이후에 세상에 공개된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릿쿄대학에 입학한 그는 ‘쉽게 쓰여진 시’를 쓰고 10월 송몽규가 다니는 도지샤대학으로 전입학 한다. 이 학교 역시 일본 조합교회 소속의 미션스쿨이었다. 1943년에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당시 송몽규는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을 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 일을 ‘재도쿄 조선인 학생 민주주의 그룹사건’으로 명명했다. 두 사람은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시신을 수습하러 온 시인의 아버지에게 송몽규는 자신과 윤동주에게 놓아졌던 정체불명의 주사를 언급하는데 이로 인해 생체실험의 의혹을 제기됐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서시’를 빼놓을 수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외울법한 작품이다. 그의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우선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은 까닭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시인으로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했고, 그러한 처절한 마음이 보통의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는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확립했다. 서울대 김윤식 명예교수(국어국문과)는 “한용운의 시가 슬픔을 이별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식민지 치하의 정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했다면, 윤동주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가난과 슬픔을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극복하여 식민지 후기의 무질서한 정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또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과 생활에 대한 애정 있는 관찰,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신앙과 시의 형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 ‘부끄러움’의 시어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시는 ‘코스모스’, ‘또 태초의 아침’, ‘길’, ‘별 헤는 밤’, ‘서시’, ‘참회록’,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등 총 8편이다.
이 가운데 ‘참회록’은 윤동주의 시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현실에 의거하거 있는 강력한 저항시로 꼽힌다. ‘윤동주 평전’을 쓴 소설가 송우혜 씨는 ‘참회록’ 속의 부끄러움을 ‘창씨개명’과 관계 지어 해석했다. 시가 쓰인 시점이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손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서류를 제출하기 불과 닷새 전이라는 점에서 뼈아픈 욕됨을 ‘참회록’에 담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참회록을 쓴지 꼭 1년 6개월 후에 시인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될 당시 시인은 일본 유학의 이유를 “조선독립을 위해서 자신이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다만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연구로서는 부족하기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의 의미가 단지 시대상황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한정되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부끄러움에 성실하게 직면하고 괴로워했으며, 거기서 미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윤동주문학관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하문고개에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함께 하숙생활활을 했다. 당시 이 언덕을 지나 통학을 하기도 했고, 인왕산에 올라 자연 속에서 시정을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이 이 시기 탄생한 작품이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의 발자취와 세상을 향한 시선을 기억하고자 2012년 윤동주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1974년 만든 물탱크와 가압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윤동주문학관은 건축학적으로도 우수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제3 전시실 영상관에서 시인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원래 물이 모여 있던 공간을 그대로 사용해 유난히 크게 들리는 울림소리와 한 귀퉁이를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골목길역사산책의 저자 최석호 교수(서울신대)는 “시인의 삶을 영상으로 읽다보면 후쿠오카 차디 찬 감옥에서 매일 강제로 주사를 맞으면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야만 했던 시인의 철저한 고독과 두려움이 느껴져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며 삼청동을 찾는 이들에게 반드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