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위해선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민중을 붙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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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위해선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민중을 붙들어야”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9.23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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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우사 김규식 선생

언더우드 선교사 만남 통해 인생 전환기독교 건국론 내세워

유창한 외국어로 외교 독립운동 활동해방 후 좌우합작투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첫째 줄 오른쪽). 회의장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 힘썼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첫째 줄 오른쪽). 회의장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 힘썼다.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들자.”

제국주의 열강들의 경쟁적인 침략으로 약소국은 제대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주권을 뺏길 수밖에 없었던 100년 전. 그 암울했던 시기에 8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5000년 역사를 지닌 한국의 존재와 독립의 당위성을 알린 이가 있었다. 죽는 날까지 민족의 독립과, 진정한 광복인 한민족의 연합을 위해 헌신했던 우사 김규식 선생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내기도 했던 김규식의 바탕에는 언제나 신앙이 있었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 한 손으로는 하나님, 한 손으로는 민중을 붙들어야 한다고 호소했던 김규식의 삶과 신앙을 통해 그가 꿈꿨던 조국을 조명해봤다.

 

인생을 바꾼 언더우드와의 만남

우사 김규식 선생
우사 김규식 선생

 

김규식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지성은 유학까지 다녀와 동래부사를 지냈던 인물이었으나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귀양을 가야 했다. 이 충격에 어머니까지 사망하며 당시 6살에 불과했던 그는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빛이라고는 한 틈도 보이지 않던 이 불행이 선생의 삶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고아처럼 자라던 그를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발견하고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열악한 상황에 방치돼있던 아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진히 간호했다.

건강을 되찾은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레 기독교를 접했다. 이후 그는 미국 유학 2년차였던 1898년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미국 유학은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었던 그의 간절한 바람에 성사됐다. 당시 3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재학 중이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입학한 그는 바다를 건넌지 얼마 안 돼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김규식은 유학 1년 만에 준우등의 성적으로 예과를 졸업했고 본과에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언어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생전에 영어, 불어, 중국어 등 8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전체 졸업생 중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였지만 박사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대학원의 제안을 단 칼에 거절한다. 그 이유는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민족과 조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의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는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직과 장학금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이마저도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외서 외교 통한 독립운동 힘써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이 점점 극심해지던 1910년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국내를 떠나 해외로 향한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와 멀지 않은 거리의 상해를 근거지로 택했고 김규식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 분야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설립한 김규식은 191811월 한국 대표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고자 했다. 외교권을 빼앗긴 터라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하고 전 세계 만방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데 힘썼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외무총장으로 임명된 그는 한국대표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이름을 바꾸고 회보를 발간해 3.1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홍보했다. 비록 열강들의 제국주의 논리에 밀려 한국 문제가 회의 주제로 상정되지는 못했지만 김규식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노력은 회의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를 찾았던 각국 대표들을 직접 찾아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 독립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조국을 떠나 해외를 전전했던 터라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1910년 새문안교회 장로로 피택 받았던 그는 어디에 있든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김규식은 김구, 이승만 등 대표적인 크리스천 독립운동가와 함께 기독교 건국론을 내세우며 해방된 조국은 기독교 중심 국가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념 뛰어넘어 좌우합작 외치다

1945년 민족은 바라고 바라던 광복을 맞았지만 국내 상황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좌와 우, 남과 북 둘로 나뉜 조국은 어떤 나라를 세울지를 놓고 극명하게 대립했다. 그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귀국한 김규식에겐 해방된 고국의 공기를 맘껏 누릴 여유는 없었다.

그는 단순히 고국이 자유를 되찾은 것만이 아닌 하나 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라 믿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민족을 분열시키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을 세워보자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에 나섰다.

김규식은 좌익과 우익, 모두의 미움을 무릅쓰면서도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며 분단을 막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기어코 벌어지고 만다. 자신의 희생을 아랑곳 않고 민족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에 투신했을 정도로 강직했던 그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는 급박한 상황에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된 선생은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는 김규식은 침략받지 않는 강국을 세우려면 그리스도라는 반석위에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 가치관 위에 국가가 건설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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