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1524년)(1)
상태바
혼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1524년)(1)
  • 주도홍 교수
  • 승인 2019.08.21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57

그리스도인과 경제

‘그리스도인과 경제’라는 주제에서 크리스천이 읽어야 할 기본적 문서로 평가하는 글이 1524년 12월 28일 취리히에서 세상에 등장했다. 취리히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가장 의미 있는 사회비판 문서인 이 글은 취리히 종교개혁이 시작되어 5년이 지났을 때, 혼란의 현장에서 출생했다. 1524년 7월 당시 스위스 연방은 농민전쟁의 발발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1525년 엘자스와 튀링엔 지방에 농민전쟁이 일어났으며, 1526년 7월 스위스 남부에 이르기까지 농민전쟁의 기세가 확장되었다. 이에 뉘른베르크에서 소집된 제국의회(1522~1524년)는 츠빙글리를 혼란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소환했다.

제국의회는 사회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선동적 설교’를 금하고 ‘순수한 복음’의 선포는 허용하였지만, 교황과 황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제국의회는 급진적 종교개혁보다는 온화한 종교개혁을 지지하며, 츠빙글리의 취리히를 스위스 연방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는 치솟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며, 정치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이때 츠빙글리는 혼란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비관적으로만 상황을 보지 않고, 종교개혁의 비전을 잃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로 본 모든 삶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꿰뚫으며, 종교개혁의 에너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한 츠빙글리의 핵심 이론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분리는 있을 수 없으며, 이론과 실천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츠빙글리에게 루터식의 두 왕국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츠빙글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성경적 관점에서 문제를 찾아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혼란의 이유로 몇몇 이기적 종교 지도자들, 부패한 교회 계급, 강자 중심의 경제 구조로서 토지, 이자 그리고 노동의 문제를 여지없이 파헤친다.

츠빙글리는 자유 시장경제의 적법한 순환을 주장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와는 다르게, 츠빙글리는 재 세례파 사람들과 차별화하면서도 그들과 협력할 수 있기를 소망했는데, 그들이 사회 혼란의 이유가 아님도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문제로 제기했던 유아세례는 츠빙글리에게 종교개혁의 쟁점이 될 수 없었다. 츠빙글리와 그들 사이에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는데, 재 세례파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그들을 거부한 것으로 생각했다. 

츠빙글리의 3부로 된 이 글은 1부: ‘선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며 사회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인지, 2부: 사회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누구인지, 3부: 일치와 평화로 가는 길, 곧 복음적이고 평화로운 삶의 성취의 길을 언급한 후, 결론으로 마감한다. 1, 2부에서 혼란의 원인과 문제의 근본을 다룬 츠빙글리는 3부에서 담담한 필치로 대안을 찾는데, 높은 이자의 폐지와 십일조의 활용을 그리고 영주들의 이기심과 공공의 이익이 함께 하는 대안을 위해 스위스 연방의 대표자를 선출해 더욱 탄탄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제안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