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속 조선 최초의 타이틀 많아… 국제정세 분석 정통
민족자강 위해 교육사업 등 매진, 일제 후반 친일로 돌아서
1910년 에딘버러선교대회 조선 대표해 참석, 두 번 발제해
다재다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 언론인이었던 좌옹 윤치호(1865~1845년)는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며 기독교 정신을 가졌던 거물급 민족지도자로 평가된다. 동시에 해방 전 중추원 참의에 선임되면서 친일의 굴레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됐다.
역사를 그를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구분하지만 그의 생애 전체를 친일파로 몰아세우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이 힘을 갖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사회사업과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기독교적 신앙 가치를 민족 속에 투영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비록 그가 마지막에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했지만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도 시사하는의미가 크다.
조선의 천재 ‘윤치호’
윤치호는 일찍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공부하며 국내외 정서를 관통하는 정보와 지식을 가졌다. 팔십 세까지 생존했던 윤치호는 60년 동안이나 영어로 일기를 쓰기도 했다. 일기에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고 성경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윤치호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다수 가지고 있다. 비록 명문 양반가에서 출생했지만 서자 출신의 아버지에다 본인 역시 서자였던 그는 당시 조선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해외로 시선을 돌렸다.
어릴 때부터 윤치호는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세 때 신사유람단으로 방문한 후 우리나라 첫 일본 유학생으로 케이오 의숙에서 공부했다. 김옥균의 권유로 잠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해, 불과 19살 나이에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에서 일하며 조선의 첫 영어통역관 타이틀도 갖게 됐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지만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공부했고 다시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미국 유학에 앞서 그는 잠시 알렌 선교사가 설립한 중국 상하이 중서서원에 입학해 공부했다. 급진개화파를 피해 떠났던 상하이에서 한때 술과 성에 빠져 폐인처럼 살았다. 그 때 알렌 선교사의 신앙과 인격에 깊은 인상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교는 내 인생의 의무”
1887년 알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아 조선 최초의 남침례교인이 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벤더빌트대학교 영문과에서 신학과 영어를 공부한 후 조지아주 옥스퍼드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특히 벤더빌트에서 그는 늘 수석이었다. 당시 그가 쓴 일기에는 “내게는 실천해야 할 선교가 있다. 내 생은 이 의무에 어느 만큼 충실하게 부응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라질 것이다. 선교란 내 겨레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하는 일이다”고 기록돼 있다.
투철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을 갖춘 미국 사회에서 공존했던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아픔도 컸다. 어쩌면 이 때 윤치호는 정의보다 힘에 대해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고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당시는 정부 관료로 일하면서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역을 적극 도왔다. 비슷한 시기 윤치호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만나 독립협회 창립과 독립신문 발간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독립협회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에 의해 운영됐다. 윤치호는 독립협회를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성공시키고 정부 정책에도 반영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보수파의 매도로 고종은 결국 독립협회를 해산하게 했고, 윤치호 역시 지방 행정관료로 전전하게 된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관직을 사퇴하고 늑약체결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나타냈다.
결국 친일의 길로 들어서다
윤치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귀족 작위를 반납하고 시골에 들어간다. 하지만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지역 10년이 선고받고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때 그는 일본의 전향 요구를 받아들여 풀려난다. 어쩌면 이 때 친일의 기미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국내외 견문이 넓었던 윤치호는 국제정서를 꿰뚫는 눈이 정확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18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해 “식민지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고 간파했다. 그런 이유에서 3.1운동 당시 청년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고 민족대표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대신 윤치호는 무장투쟁과 같은 독립운동보다 민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1920~30년대 물려받은 가산으로 사회운동과 교육활동을 적극 전개하게 된다. 윤치호는 일본으로부터 꾸준히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수많은 활동으로 잡혀간 동료들을 구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백석대 민경배 석좌교수는 “윤치호는 근대사에서 기독교의 기능과 역사적 사명을 정확하게 통찰한 인물이며, 기독교를 통해 우리 겨레의 참다운 능력을 일깨워주고 미래를 밀어주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면서 “기독교의 힘을 확신하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윤치호는 친일 행적을 본격 나타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보다 일본의 승리를 예상했던 것일까.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하고 특히 총독부 자문기관으로 고위 친일파에게 주는 중추원 참의와 일본 제국의회 의원직을 받아들인다.
숭실대 유영렬 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 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 순응주의가 작용했다”고 그의 친일 배경을 분석했다.
윤치호는 1945년 11월 말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뇌일혈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일부에서는 친일 행적에 대한 회의로 인해 자결했다는 주장도 있다. 윤치호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세속 권력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우리 모습을 투영해볼 수 있어 보인다.
1910년 에딘버러 간 윤치호
윤치호의 생애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조선의 대표단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기획하던 존 모트가 조선을 방문했을 통역을 맡았고, 당시 대부흥이 일고 있던 조선 교회를 보고 윤치호를 초청한 것이다.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세계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교회 역사에서 모두 중요한 전기가 되는 대회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국제행사를 참관하는 수준이 아니라 두 번이나 현장에서 발표했다. 윤치호는 복음이 전래된 지 불과 25년 만에 20만 명으로 부흥 성장한 조선처럼 상향식 선교가 전 세계에서 이뤄져야 한다면서도 급성장에 따른 여파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
미국 남감리교를 대표로 나선 두 번째 발제에서는, 선교지에서 재정 사용은 선교사가 주도하기보다 현지 신뢰가 바탕이 되고 토착 교회지도자와 협력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딘버러에서 윤치호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교회 역사과정에서 있었던 한국교회 병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조선에서 참석했던 마포삼열 선교사와 조지 존스 선교사도 당시 조선 교회의 성장비결과 교육에 대해 발제하기도 했다.
한편,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동안 작사가를 두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가 그대로 실려 있는 점 때문에 윤치호 작사가 정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