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철한 기독교 독립운동가 집안…목숨 걸고 항일
조선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와 민족 교육에 앞장
1919년 3.1운동을 이끈 주역으로 대개 사람들은 유관순 열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훗날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을 뿐 일제강점기에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좋은 신랑감이 나타나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며 거절하고 평생 독신으로 오로지 애국지사의 길만 걸었던 김마리아(1892~1944) 역시 그 중 한명이다.
일본경찰에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할 이유가 있소?”라고 당당히 대답한 그는 사실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최고 엘리트였다. 그럼에도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한 김마리아는 평생을 독립운동과 여권신장 및 민족교육에 헌신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 알의 썩은 밀알’로 독립운동
김마리아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다. 유학생 신분으로 동경에서 열린 2.8독립선언대회에 참석한 그는 독립선언서를 필사해 기모노 옷 속에 숨긴 뒤 부산항으로 몰래 입국한다. 그리고 서울·대구·부산 등 전국의 여성·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건네며 거국적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대학졸업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 적발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위험천만한 임무였지만 그에게는 한 치의 미련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이후 정신여고 동료교사 및 학생들과 3.1운동에 주도적으로 동참한 김마리아는 그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리고 가슴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짓이기는 등 여생을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할 만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수감된 와중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찬양을 부르며 성경을 외웠고, 특히 국민의 절반이 되는 여자들이 현실을 자각해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해달라며 통탄의 기도를 드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김마리아가 신실한 크리스천 여성독립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안 분위기’에 기인한다. 김마리아가 나고 자란 황해도 소래마을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내린 곳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부친은 이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김마리아가 어렸을 적 일찍이 눈을 감은 모친은 임종 순간에도 딸의 교육을 부탁했다. 또 큰아버지 김윤오는 애국계몽단체 서북학회를 조직했으며 삼촌 김필순의 집에는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의 저자 박용옥 교수는 “김마리아가 일제의 간악한 탄압에도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근대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자연스레 구국신앙을 기른 김마리아는 항일운동으로 감옥생활을 경험할수록 ‘나라 없는 고통이 이다지도 쓰린 것이라면 그 나라를 반드시 찾아 온 국민으로 하여금 행복과 안녕을 누리게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부연했다.
최고 엘리트…여성차별 철폐 외쳐
김마리아는 조선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억압받던 여성들의 차별문제를 극복하고 평등한 민주사회로 거듭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같은 그의 신념은 소래학교와 정신여학교를 거쳐 미국·일본·중국에서 유학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1919년 9월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 규모의 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것도 이런 연유다. 침체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김마리아가 직접 작성한 취지서에 따라 애국부인회는 지역 곳곳에 15개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관련 인쇄물을 배포하는 등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간부의 변절로 11월 애국부인회 회원 52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김마리아 등 9명은 기소돼 1~3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한 번 혹독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몸이 남아나지 못해 급기야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이른 김마리아는 다행히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6개월 뒤인 1920년 5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이후 망명한 중국 상해에서는 여성 최초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돼 활동을 이어갔다.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과 최상도 교수는 “김마리아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귀한 형상’이라는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한평생 유교체제와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섰다”며 “조선 여성으로서 누구보다 많이 배웠지만 개인적인 출세나 권력 추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아직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여성들의 연대와 계몽에 힘썼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정치가 이 땅에 실현돼야 한다는 의지와 신앙의 실천”이라고 했다.
실력인재 양성…‘하나님 나라’ 꿈꿔
한편 1921년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본인의 ‘실력’을 더 키우고자 2년 뒤 미국 LA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파크대학과 시카고대학 등에 진학해 사회학과 신학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에서 황에스더 등 옛 동지 8명을 만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격인 ‘근화회’를 결성했다. 재미동포들의 애국정신을 북돋고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후원했으며 출판·강연으로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외국인들에게 알렸다.
그가 한국으로 귀국한 건 그로부터 10년 넘는 세월이 훌쩍 흐른 뒤였다. 1935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그는 1943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될 때까지 후학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성서과목을 담당했던 김마리아는 특별히 핍박받는 민족에게 새 희망을 주는 예언서인 다니엘서·요한계시록 강의에 열정을 쏟았다. 이와 함께 장로교 제7대 여자전도회장으로 선출돼 제10대까지 연임하며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이방원 박사는 “김마리아가 망명 기간 내내 독립운동과 더불어 학업을 지속적으로 병행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에 실망해 동포를 살리는 길은 정치뿐만이 아닌 교육에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의 교육관은 단순히 여성계몽이나 인재육성을 넘어 모든 이들이 사회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더 넓은 안목이었다. 그의 국가관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