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순종해 무슬림 복음 전파 위해 달려온 30년, 죽을 고비도 여러 번
오직 주님만 좇아온 인생 … “끝까지 예수님 전하다 보르네오에 묻힐 것”
“아무리 악한 자식도 부모의 마지막 유언은 지킵니다. 우리 주님의 마지막 유언은 가서 제자삼고 세례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하고 제자 훈련하는 거예요. 지금도 밀림에서는 예수님의 유언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최소한 여든 살까지는 튼튼하게 사역할 겁니다.”
올해 나이 일흔의 강신오 선교사는 적도의 땅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보르네오)에 자신이 묻힐 묘지를 마련했다. 언제 은퇴하는지 묻는 질문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다’는 답변이 단호하게 돌아왔다. 무슬림 지역에서 지난 30년 동안 사역하면서 단 한 번의 안식년도 갖지 않았던 강 선교사. 지친 몸 때문에 이제야 첫 휴식의 시간을 갖고 고국을 찾은 강 선교사를 만나 그의 신앙과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았다.
“죽을 고비 참 많이도 넘겼습니다”
지난 2월 강신오 선교사는 오랜 숙원이었던 밀림 복음화의 전초기지 ‘선교센터’를 완공했다. 수많은 난관이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오로지 믿음만으로 뚝심 있게 밀어붙였던 결실이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지평선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고 “주님 비~ 주님 비~”를 외치며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기적처럼 구름이 피해갔다. 현지 건축업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 영안교회 선교팀을 연결시켜주어 이겨낼 수 있었다.
큰 과업을 이룬 후 찾아온 후유증 같은 것일까. 공수부대 출신답게 강단 있는 사역을 펼쳐왔던 강 선교사도 몸이 지치는 것을 느꼈다. 마침 영안교회가 파송한 김정섭 선교사가 일년째 동역하고 있어서 선교지를 맡기고 모처럼 고국에서 길게 머물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제자가 사역하는 우간다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가 천직이라면 그를 두고 하는 표현일 듯 싶다.
“적도회귀선을 지나는 국가는 남미 에콰도르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두 곳 뿐입니다. 이제 미션센터에서 차세대 지도자들을 길러내 정글로 파송할 겁니다. 교단에서 인준한 해외 첫 신학교육기관 보르네오신학교에서 목회자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적도에서 영적 태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몸은 지쳤을지 몰라도 마음은 여전히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넘쳐났다.
말레이시아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현지인 사역을 하다, 쫓겨나듯 국경을 넘어 도착한 곳이 1999년 인도네시아 폰티아낙시였다. 종족 간 분쟁으로 2천명이 살해된 당시 현장에서 그는 오토바이 한 대를 마련해 시가지를 돌며 도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5년 동안 정글을 돌아다니면서 개척사역을 했다. 신학교를 세우고 자국민 선교사 훈련원을 만들었다. 누가 시키는 것도, 감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열도의 땅에서 그는 누구보다 뜨겁게 사역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어린이전도협회를 개척해 온갖 곳을 누비며 사역할 때는 일년에 2만명을 전도한 기록도 있다. ‘예수영화’를 들고 밀림으로 들어가 상영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귀신들린 사람, 병에 걸린 사람, 무속인까지 찾아왔고 예수님을 만났다.
“한번은 밀림 마을에서 ‘뚜끈’이라는 무속인 3명이 전부 복음을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새벽 4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횃불을 든 주민들이 몰려오는 거예요. 믿고 따르는 ‘뚜근’을 없앴다고 죽이려는 줄 알았어요. 죽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해져요. 그런데 주민들은 뚜끈을 변화시킨 사람을 만나겠다고 그 새벽에 온 겁니다.”
강 선교사는 지금은 사역이 안정 되어서 재미가 덜해졌지만, 죽을 고비를 참 많이도 넘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사역했던 강 선교사에게 고국에서 생활이 편안하긴 하지만 뭔가 싱거운 느낌도 있다.
지금 강 선교사는 경기도 어느 작은 교회 유아실에서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다. 좋은 선교관을 추천해주겠다고 했지만 폐 끼치기 싫다고 한사코 손 사레를 쳤다. 고집도 무척이나 세다. 강 선교사는 그렇게 선교지에서 살았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약속만 좇아서
사실 강신오라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이다. 강원도 강릉 태생의 그는 젊은 시절 지역을 주름잡던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할 것이 성장했고, 거칠 것 없이 싸움질도 해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허무함이 찾아왔다. 뒤늦게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에서 CCC 수련회 포스터를 우연히 보고 예수 믿는 청년들이 궁금해 CCC 회관을 찾아갔다.
“사영리를 전하는 사람이 형제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어요. 완전히 눈물 콧물 다 쏟았죠.”
알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다 달아난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고등학교 후배 60명을 윽박질러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할 정도였다. 서툴렀지만 가슴의 뜨거움을 어쩌지 못할 때였다.
그러다 1980년 여의도광장 ‘세계복음화대성회’에서 그 음성을 들었다. 선교에 헌신할 사람을 강요하는 듯해서 불만이 쌓여갈 때 지금도 오싹한 그 음성 ‘보르네오’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리고 딱 10년 걸렸다.
그 사이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전설처럼 사역했던 시간이 있었다. 어린이를 전도하면 민족 복음화가 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사역했다. 그리고 10년 후 어린이전도협회 파송을 받아 해외로 떠났다. 1990년 한 달 동안 배수진을 치고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한 열매였다.
강릉에서 양육했던 제자 중 홍콩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연결해주어 싱가포르로 떠났고 곧 말레이시아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사역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교회 개척이 불법일 뿐 아니라 3개월 여행비자를 가지고 9년을 버텼다. 주로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을 복음화 하는 사역이었다. 낮에는 아프리카 사람, 저녁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토요일이 되면 잠을 잘 못잡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불법체류로 잡힐까봐 무서워하는 노동자들을 데리러 토요일이면 건축현장으로 다녔어요. 경찰에게 수십번을 붙잡혔는데, 그 때는 그런 깡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성탄절 예배를 드릴 때 작심하고 단속을 나왔어요. 성탄절인데 오늘은 봐주고 다음주에 그대로 모아놓을 테니까 그 때 잡아가라고 했어요.”
2대의 경찰버스를 몰고 왔지만 경찰은 그대로 돌아갔다. 다음 주에도 오지 않았다. 어느 때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치료를 제대 받지 못한 지체를 살리지 못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몸부림치면서도 그의 사역은 쉼이 없었다.
도시의 사역을 현지인 사역자에게 이양하고, 언젠가 외부인 접촉이 금지된 ‘오랑아슬리’ 원주민에게 전도를 나갔다가 발각됐다. 파장이 커져 주변에서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며 도망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르네오 동말레이시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넘어왔고, 다시 국경을 지나 인도네시아까지 흘러나왔다.
가본 적도 없고 맨손이었다. 그의 사역이 지금까지 일궈진 여정은 역경 그 자체였다. 세련되고 잘 갖춰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처음 선교사로 헌신했을 때 다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일절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명함도 없다. 자신 이름의 통장 하나가 없다. 건강은 자신했는데 요즘엔 체력이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여전히 뜨거운 불길 같았다. 꾸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서 선교사의 모델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