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종교개혁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싸워야 할 전선은 양쪽이었다. 한쪽은 로마교회이고, 다른 한쪽은 내부였다.
농민전쟁은 안에서의 싸움이었다. 본래 농민전쟁의 주역 토마스 뮌처(Thomas Muentzer)는 루터의 추종자로서 루터는 1524년 그를 츠비카워의 목회자로 추천했었다. 1524년 6월 23일 시작된 농민봉기는 독일어권인 남부독일, 튀링엔,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위스에까지 확장되었다. 1525년 3월 메밍엔의 로처(S. Lotzer)가 인간 권리 회복을 위해 작성한 12조항을 외치며 시작된 농민봉기는 1525년 슈바벤, 프랑켄, 엘자스 그리고 튀링엔 지역으로, 1526년 작센과 티롤에까지 번졌다. 규모는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기까지 많은 농부들이 함께 할 정도였다.
‘농민전쟁’(Bauernkrieg)이라는 말은 152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되었고, 루터 역시 이때부터 농민봉기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뮌처는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을 해방시키고자 폭력까지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뮌처는 공정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는데, 모든 특권이 사라지고, 수도원들이 해체되고, 노숙자들에게 숙소가 제공되며,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이 제공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뮌처는 모든 사람이 재물을 공유하며, 동일하게 노동에 참여하고, 지배 권력이 사라져야 함을 주장했다.
이에 많은 농부들이 호응하여 농민전쟁에 참여했으나, 결국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뮌처는 1525년 5월 체포되었으며, 고문당하였고, 참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터는 여러 지역의 농민전쟁을 보며, 적지 않은 글들을 통해 그들을 육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로 정죄하였다. 루터는 1525년 그들을 대해 강도, 살인배, 폭도(Rotten)라는 보다 엄한 표현을 가져오며, 이에 호응한 농민들을 비판하였다. 그들이야말로 평화를 깨뜨리고 분란(Aufruhr)을 일으키는 몹쓸 무리였다.
특히 루터는 앞에 언급한 12조항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1) 루터는 이 농민봉기에 대해 처음에는 판단을 유보했었는데, 그들의 권리 주장과 농민계몽을 향한 노력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본래의 취지를 망각하고 약탈하고, 난폭하며 너무 멀리 나가 날뛰는 미친개와 같이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거기다 결정적으로 “12 조항을 복음의 이름으로 잘못을 덮어씌울 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루터에게 그들이 하는 짓은 “마귀의 짓”(Teufelswerk), “마귀의 괴수”(Erzteufel)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처음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진무구한 가난한 사람들을 허황되고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태도를 루터는 방관할 수 없었다.
루터는 그들이 세 가지 면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엄한 죽을죄를 영육 간에 범한 것으로 보았다. 첫째,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 권세에게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데,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외람되게 이를 어겼을 뿐 아니라, 그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둘째, 그들은 두 번째로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는데, 폭도들이 되어 미친개처럼 강도질과 도둑질을 하며 수도원과 성을 약탈한 노상 강도짓과 살인자가 되었다. 셋째, 그들은 이런 사악한 범죄를 행하면서 그것이 복음의 요청이라는 넋두리를 늘어놓아 소스라치게 깜짝 놀랄 중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그리스도적 형제라 부르며 서로에게 서약과 충성을 하니, 참으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그들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신의 모독자요, 파렴치한이다. 곧 그들은 복음의 외양을 가진 마귀들이다.
1) M. Luther, Ausgewaehlte Schriften, Bd. VI, 19-171.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여러 글들이 여기에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