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1521년 5월 21일부터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동안 비텐베르크 시의 종교개혁은 비텐베르크대학교의 루터의 동역자 칼슈타트(A. Karlstadt)와 츠빌링(Gabriel Zwiling)이 대신하였다. 문제는 그들의 종교개혁의 실천이었다. 사적 미사는 폐지했으며, 성찬예식은 바뀌었고, 사순절의 금식은 중단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화상은 발에 밟혔고, 불에 태워졌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성도들은 당황과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이 소식이 바르트부르크에 거주하는 루터에게 전해졌다. 조금 더 머무르다 부활절을 기해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려 했던 루터는 사순절에 당겨 와야 했다. 루터는 후원자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편지를 썼다. 비텐베르크교회가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이 급히 서둘러 가서 이 문제를 평정해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루터는 1522년 3월 6일 이미 비텐베르크에 도착했고, 3월 9일부터 16일까지 한 주간 동안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8회에 걸쳐 설교를 하였다. 내용은 구체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개혁을 추구해야 할 것인 지였다. 루터는 개혁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되, 믿음이 약한 자를 생각해서 인내로써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폭력을 멀리하고 사랑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른 신앙에 서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3월 9일 주일 첫 번째 설교를 하였다. 설교의 첫 마디는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개혁자 루터, 죽음에 처한 루터를 실감나게 하는 서두였다. “우리 모두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남을 위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를 위해 죽음으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를 “죽음의 시대”(die Zeit des Todes)라고 부르며, 깨어 확실히 알고, 스스로 영적으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지만 루터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고전 13:1을 인용하며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설교한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과연 그 개혁이 해당 형제에게 유용하고 요구되는 일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루터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는 고전 6:12을 인용한다. “내가 만약 비텐베르크에 머물렀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혼돈처럼,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개혁을 한다는 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먼저 살폈어야 했습니다.” 루터는 빛과 열을 가진 태양처럼, 신앙은 확고한 빛과 같지만, 사랑은 휘어지거나 굽어지는 열과 같다고 말한다. 너무 한쪽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뛰는 자가 있는 반면, 걷는 자가 있고, 기는 자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 개혁하는 자들이 알아야 할 두 가지는 “해야만 하는 것”과 “자유 함”이다. 성도는 의무와 동시에 자유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1520년에 쓴 『기독교인의 자유』에서도 다르지 않은데, 죄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에서 행해지는 섬김이다. 이에 대해 칼슈타트는 루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칼슈타트는 잘못된 것, 위험한 것은 가능한 빨리 없애고 치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성화논쟁은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의 다툼이었는데, 1524년 슈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카피토(W. F. Capito)는 성화논쟁을 평가절하하며 그 의미는 아주 미미하다 하였다.
주도홍 백석대학교 부총장/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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