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수도사 루터는 어느새 유명인사가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반박 95조로 역사에서 가장 소문난 인물이 된 루터는 6개월 후 외출을 떠나야만 했다. 목적지는 1518년 4월 말 남부 독일 하이델베르크였다.
교황청은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장을 통해 95조에서 말하려는 루터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면밀히 확인하려 했다. 루터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당에 토론을 위해 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과 몇몇 교수들 그리고 많지 않은 학생들이 함께 했다. 아직은 그 살벌한 중세교회의 종교재판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교황청의 의중을 반영한 루터를 향한 일종의 프로체스였다. 그렇지만 루터는 더 이상 면죄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루터는 왜 중세교회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말았는지를 신학적으로(28항) 그리고 철학적으로(12항) 나누어 총 40개항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루터에게는 비텐베르크 밖에서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비판자들을 대해서는 입장을 보다 확실히 대변할 수 있는 기회였다. 루터는 이 토론문의 머리에서 바울 사도가 선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자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신실한 해석자로 일컬으며 잠언 3장 5절 하반절 말씀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를 근거로 제시했다.
루터의 확신은 중세교회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시작된 철학적 신학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진정한 신학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할 때만 이뤄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여기에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쳐야만 했다.
게다가 루터는 중세교회의 오류를 크게 두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이신칭의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는 무가치하다. 둘째,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예수님에게서 만나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당시 막강한 권세와 화려한 교황청이 보여주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잘못이다. 당시 1518년 하이델베르크 토론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후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로 부상한 마르틴 부처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독일 남서부 지방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하이델베르크 토론 40항 가운데 몇 항을 번역 인용한다.
가장 거룩한 생명의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을 의로 이끌지 못 한다. 도리어 그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데 거대한 하나의 장애물이다.(1항) 인간의 공로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빛이 나지만, 실상은 내적으로 볼 때 죽음에 이르는 죄악을 벗어나지 못한다.(3항) 은혜와 믿음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행15:9)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그 어떠한 선행도 행할 수 없다.(9항) 율법은 겸손하게 하고, 은혜는 용기를 주며, 율법은 두려움과 분노를 일으키고, 은혜는 소망과 긍휼을 불러일으킨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인식을 통해 겸손하게 하고, 그 겸손을 통해 은혜에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선 행위가 비로소 자신의 행위로 신뢰한다.(16항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