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칼 5세가 함께한 보름스의회에서의 루터 심문은 1521년 4월 16일에 시작되었다.
약속대로 루터가 의회에 나타나자, 황제 쪽에서는 라이프치히 토론의 상대자 에크가 발언자로 등장하였다. 루터는 이미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파문장 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을 받았는데, 루터가 1517년 쓴 면죄부 반박 95조에서 41개의 오류를 찾았고, 루터의 다른 글들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였다.
로마제국이 독일 땅 보름스에서 루터를 재판하게 된 것은, 작센의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바로 로마로 데려가 엄한 종교재판을 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독일인이 먼저 독일 땅에서 재판을 받음이 타당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터가 보름스의회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상황이 전개될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1415년 콘스탄츠의회가 얀 후스를 화형으로 선고한 경우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의 신변을 보름스의회가 안전하게 지켜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전제로 루터는 보름스심문에 응하였다.
루터는 2주 전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출발하였는데, 그의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기세가 등등하였다. 루터가 지나는 도시의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박수로 환영하고 응원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 고타, 아이제나흐 교회에서 설교했으며 약속대로 4월 16일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4월 17일 오후 4시 약속시간에 의회의 황제 앞에 섰다. 루터의 변호인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법 학자 제롬 슈릎도 함께 했다. 루터는 상대편에서 질문 할 경우만 발언을 할 수 있었다. 에크는 루터의 글들을 쌓아둔 채, 이 모든 글과 책들이 루터가 쓴 것인지, 지금도 입장에는 변함이 없는지, 아니면 뭔가 방어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루터의 변호인 슈릎이 “그 글들의 제목을 읽어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루터의 글들은 1517년 95조 면죄부 반박문, 1520년 3대 저술 등 총 25종이었다.
이에 루터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많은 시간 기도와 친구들과 친지들과의 상의 후 루터는 기꺼이 약속대로 4월 18일 오후 4시 의회 앞에서 입을 열었다.
“모든 글들은 순전히 나의 것이며 나 혼자 쓴 글들로서, 그 누구의 지혜로운 글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모든 내 저서들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첫 번째 그룹은 나의 대적자마저도 유익하고 안전하며 참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순전하고 복음적인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다루었고, 두 번째 그룹은 그 누구도 부인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바, 모든 기독교를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교황제도와 그들의 추종자들의 잘못된 행위를 다루고 있다… 교황의 법들은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구절들과 교부들의 글에 모순되기에, 오류이며 인정할 수 없다. 세 번째 그룹은 특정한 사람들을 겨냥하며 쓴 글들이다. 그들은 로마폭군을 옹호하려 또는 기독교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인간으로 오류를 범할 수 있기에… 그 실수가 명백히 밝혀진다면, 나는 기꺼이 잘못을 시인하고, 잘 못된 글들을 불 가운데로 던질 것이다… 내가 말씀의 증거에 의해서 또는 이성적으로 분명하게 잘못이 밝혀질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 된 자로 있을 것이다. 교황과 공회가 빈번하게 잘못과 오류를 범했음이 명백히 드러난바 대로, 나는 교황도 공회 그 자체만을 신뢰할 수 없기에, 나의 글들을 부정할 수 없는데, 그것은 양심을 반하는 것으로서 안전하지도 않고 좋은 결과에 이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 어떤 조정이나 타협은 루터에게 없었다. 루터는 4월 25일 보름스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주도홍 백석대학교 부총장 /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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