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존 위클리프 얀 후스와 더불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타락한 로마교회를 소재로 한 간결하고도 쉬운 언어의 설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가 설교를 하는 곳마다 대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이같은 대중적 인기는 당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교회와 세상의 부패에 관한 비판은 타락한 성직자들로부터 증오와 미움을 샀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위클리프와 후스를 비롯해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생명을 걸고 성경을 전한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도래할 수 있었다.
회개 외친 명설교가
1452년 북이탈리아 페라라(Farrera)에서 태어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소년시절부터 생각이 많고 침울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22세 무렵 들은 설교에서 세상에서 창궐한 죄악의 타락상을 듣게 됐고, 이를 계기로 볼로냐의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의 삶을 시작한다.
볼로냐에서 7년을 공부한 뒤, 그는 교단으로부터 설교사로 파송 받아 본격적인 설교 사역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역 초기 사보나롤라는 페라라 사투리 억양과 학자적 언변 때문에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다만 1486년 사순절 설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때 이미 그의 신앙고백은 ‘계시적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로마 교회의 ‘진정한 회개’에 대한 그의 요구는 도발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북이탈리아로의 설교여행 중 설교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한다. 브레스키아 설교에서 사보나롤라는 장차 그가 할 설교의 세 가지의 핵심 메시지를 담기 시작한다. 그 세 가지는 △교회는 채찍을 맞게 될 것 △교회는 새로워질 것 △이 모든 일이 빨리 이뤄질 것 등이다.
장차 다가올 종교개혁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이 설교는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했고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보나롤라는 1490년 메디치가의 초청으로 피렌체에 입성했고, 1492년 무렵에는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청중이 너무 많아서 산마르코 성당에서 산타마리아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부패를 씻기 위한 ‘신의 칼’이 곧 내려올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교회로 옮기게 했다.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로마교회의 모습과 사치와 오락에 빠진 대중을 겨냥하며 교회의 도덕성 회복을 촉구했다. 특히 예술과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메디치 가문의 횡포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힘 있게 부르짖었다.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 피에로 메디치의 무능이 더해지면서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더 큰 호응을 얻었고,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많은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했다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이상주의 실현한 정치가
사보나롤라는 파국을 예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샤를 8세에게 파견된 피렌체의 특사로서 혼란을 종식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샤를 8세와 피렌체 시민들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에 사보나롤라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잊지 말라”는 말로 샤를 8세를 설득해낸 것이다. 이로 인해 샤를 8세는 피사의 회복, 성채의 복원, 프랑스 군대의 이동 등 피렌체 시민들이 원하던 내용에 합의한다.
샤를 8세가 떠나자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는 통곡파(Piagnoni, 통곡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 역시 메디치가가 물러난 공화정의 실권을 잡는다.
정치적 권위를 잡은 사보나롤라는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갔다.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교황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파문으로 응수한다. 그러나 피렌체의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파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정점으로 치달은 것은 1497년 2월 7일 ‘허영의 화영식’에서다. 사육제(가톨릭교 국가에서 사순재(四旬齋) 직전의 3일 또는 7일간 행해지는 축제)의 마지막 날, 시뇨리아 광장에는 높이 18m, 둘레 72m의 거대한 ‘사치품의 산’이 쌓여졌다.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린 세속적인 책, 음란물, 유행 가발과 유치한 가면 등을 태우는 행사였다.
사치품의 산을 도는 동안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종을 치며 불을 지폈다. 장금현 박사는 자신의 논문 ‘개혁가 사보나롤라에 관한 소고’(2002년, 명지대학교)에서 “태우는 일은 과거의 모든 행위를 제거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개혁적인 결단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개혁의 시작이었다”고 표현했다.
실패로 끝난 정치개혁
그러나 이같은 사보나롤라의 정치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청이 1498년 3월 파문의 강도를 높여 사보나롤라의 신병을 로마로 인계하지 않으면 로마와 나폴리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 시민의 재산을 강탈해도 좋다고 선포한 것.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종교적 신념보다 자기 재산이 더 중요함을 깨달은 시민들이 그동안 보냈던 열광적인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연세대 김상근 교수(신학과)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인간이란 아버지가 죽임 당한 일은 곧 잊을 수 있어도 자기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 잊지 못한다’고 한 말이 여지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피렌체에서 4년간 몰아닥쳤던 종교적 열광주의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사보나롤라가 이끌던 산마르코 수도원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한 설교가가 사보나롤라에 대한 공개 도전장을 던졌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가인지 ‘불의 심판’을 통해 겨뤄보자는 것이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길을 만들고 그곳을 걸어서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이 ‘불의 심판’의 내용이었다.
1498년 4월 7일, ‘불의 심판’이 열린 날. 시뇨리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가운데 30미터의 장작더미로 이뤄진 ‘불의 길’이 마련됐다. 사보나롤라의 산마르코 수도원을 대표하는 수도사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대표하는 수도사가 불의 제단 앞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보나롤라 측 수도사들이 “하나님이 불의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외쳐댔다.
이 말을 들은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향해 “예언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며 비난을 쏟아냈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고 1498년 5월 23일 화형을 당해 죽게 된다.
개혁 가능성 연 선구자
사보나롤라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적지 않다. 정성구 교수는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처형을 당하고 있을 때 루터는 겨우 14살의 가난한 학생으로서 학비 조달을 위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먼 훗날의 위대한 사역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이어 “사보나롤라는 위클리프나 후스처럼 신학적으로 내어 놓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가 속한 당시 로마교회의 부패와 죄악을 통렬히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순교 당하는 날까지 계속했다”며 “사보나롤라는 설교의 부흥을 통한 교회개혁의 선구자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고 전했다.
특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명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의 설교가 담고 있던 ‘성경중심’, ‘본질에 대한 강조’, ‘교권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은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교회의 상황 속에서 다시금 그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백석대 김진하 교수(역사신학)는 “사보나롤라가 정치개혁까지 함께 하려다가 사실상 실패했지만 그것만으로 사보나롤라를 평가하기는 어렵다”며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목숨 걸고 전했던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종교개혁의 도래에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오늘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덩이를 조각가가 잘 다듬어 놓으면 불상이 된다. 그 돌덩이 앞에 엎드려 수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양쪽 모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므로 공정해야할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얼마나 입장 곤란하겠는가? 사찰의 불상이 도둑당하거나 교회에 벼락이 떨어져도 부처나 예수는 신경 쓰지 않는데 개인의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기독교인들이 착하게 살더라도 천당에 가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천당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당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천사가 안내하는 것인데 천사는 인간의 탄생과 사망 그리고 천당과 지옥도 관리해야하므로 적어도 1천 명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천사만 지구에 보내서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되는데 수많은 천사들을 동원해서 70억의 인구를 일일이 안내하는 미련한 시스템을 운영할 리 있겠는가?
스님들이 권력과 이권 때문에 싸우는 것을 보면 불교의 수행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탐욕으로 가득한 스님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가로 시주를 받는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시주를 그치면 스님들이 이권싸움을 그치고 수행정진해서 해탈할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과거(원인)에 의해서 현재(결과)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과거는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다시 말해서 최초의 과거(원인)는 어디에서 연유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