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계실 때였다. 공생애를 지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한이 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길로 나아가는 순간에도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시며 가까이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마지막 식사에서도 ‘생명’을 상징하는 거룩한 사랑을 베푸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내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시고, 잔을 돌리시며 “이 잔은 내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다. 이 성찬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렘 31:31).
놀랍게도 ‘새 언약’인 성찬은 성령님을 통하여 십자가의 생명을 전하는 ‘형상의 미학’(Asthetik des Bildes)이 된다. 왜냐하면 성찬의 이미지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사랑의 가시적 유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이는 이야기를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가 주시는 신비한 유익을 우리에게 눈으로 직접 보고 입으로 직접 맛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사용하는 가시적 의사전달 매체를 통하여 가까이 다가오신다. 성찬을 ‘보이는 말씀’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찬은 은혜의 언약과 같은 것으로 기독교적 희망의 상징들로 가득하다. 이것들은 이미 고대의 문화로부터 현상과 관습들을 통하여 나타났다. 할례의 시행, 공동의 식사, 물로 씻음, 떡과 포도주의 회복하게 하는 성질 등이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와 같이 성찬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상징적이며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다음으로 성찬을 통하여 제시된 유형적인 것들에 의하여 영적인 진리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찬에 등장하는 상징들(떡과 포도주 등)은 단순한 표징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권능으로 자신이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명확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지극히 작은 것들을 통해서도 실로 아름다운 진리를 통찰하게 하시며 영적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우리가 세속적인 육체 가운데 거할지라도,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인도되듯이, 그 분의 영적인 은사들을 묵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종교적 심성 가운데 시간과 공간, 상징과 기호, 빛과 음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찬은 이러한 갈망을 만족케 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어리석은 유혹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지혜와 계시에 이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