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사로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 선교사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줄을 대어 한국에 방문한 귀츨라프 선교사는 한국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음을 이미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귀츨라프 선교사의 항해기를 살펴보면 천주교인 수천명이 박해받았다는 사건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서술했다. 자신들의 정보로는 수도 서울에 한 사람의 유럽인도 없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이 그저 그런 것이 있다는 풍문만 듣고 있는 정도라 판단했다.
하지만 홍주만 쪽으로 가니 천주교를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동인도회사 소속 선장 린제이의 1832년 7월 27일 일기에, ‘양이’라는 사람이 한글 자모를 써 받았고, 귀츨라프가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베끼게 했는데, 양이가 베끼면서 자꾸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관헌에게 발각되면 자기의 목이 달아난다는 암시였다. 이로써 귀츨라프 선교사는 이들이 이미 천주교를 알았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귀츨라프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여러번 물었다. 이는 외국의 신부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천주교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충청도 해안에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나 이들은 환영과 동시에 실망이 교차되었다고 한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전도문서와 성서를 나누어 주면서 한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음을 확신했다. 한국 정부의 ‘방문한 외국인으로부터 단추 하나라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금령이 내린 후로 귀츨라프는 마음이 슬펐지만 이미 배포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금지령으로 책의 가치가 높아졌으며 읽고자 하는 열성이 더 많아졌다고 확신한다. …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리라.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같지 않았다. …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귀츨라프 항해기 1832.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