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이 예정됐던 지난 4일 오전, 특보가 터져 나왔다.
‘北 황병서·최룡해·김양건 인천AG 폐막식 참석’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북한 내 최고위급 인사들이 갑자기 방한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목되는 점은 방한 인사들의 면면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제외하고는 서열 2위, 3위, 4위에 해당하는 실세라는 점이다.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대남비서.
이번과 같은 핵심인사들이 방한한 전례는 없었다. 더구나 사전에 남한 정부와 협의되지 않은 깜짝 방문인 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향해 원색적 비난을 쏟아내던 북한이어서 방문 배경에 온 이목이 집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홍원 국무총리,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류길재 통일부장관 등이 북측 인사들과 면담을 가졌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특히 남북한 인사들은 남북 상호간 대화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함께 공감했다. 구체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이끌어냈던 지난 2월 1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잇는 2차 고위급 회담을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개최하자는 가시적 성과도 얻었다. 2차 고위급 회담은 우선 이산가족상봉이 최우선 현안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면담 당시 정 총리는 청와대 방문을 제안하며 성의를 나타냈고(북한은 시간상 이유로 거절),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북회담 정례화를 언급하는 등 우리 정부의 태도에도 변화가 감지됐다.
그동안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남북경색 국면에 돌파구가 마련되는 것은 아닌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 북측 인사 방문 정치적 쇼?
하지만 일부에서는 북한이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 무대에서 체제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와 같은 방문이라는 분석이나 앞으로의 남북 간 대화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행보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한 때는 온라인 메신저 상에서 건강악화설이 나돌던 김정은 제1비서를 이들 실세들이 제압하고 방한했다는 설이 나도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관계자들은 김정은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며, 건강악화설을 일축했다.
어쨌든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도발, 이로 인한 5.24 대북제재 조치 이후 악화일로를 거듭하던 남북 관계에 개선 가능성이 커진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 정부는 비공개된 북한의 메시지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실세 3인방이 4일 밤 전용기로 돌아간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7일 오전 북한 경비정 1척이 남측 NLL를 침범했고, 남북 함정 간 사실상 교전도 벌어졌다.
도대체 최근 며칠 간의 북측의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만 하다. 북한의 오락가락 행보는 이번만이 아니다. 과거에도 6자 회담을 진행 중에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하는 것과 같은 사례는 빈번했다.
또 우리 정부가 북한의 선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도발, 그 이전에 박왕자 씨 피살에 대한 북한의 성의있는 사과를 요구해오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보혁 교수는 “이번 만남으로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해질 수 있는 긍정적 결과는 얻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다”며 “이번 서해안 교전과 같은 사례를 비롯해 그동안 대남도발에 대한 북측의 사과, 우리 정부의 5.24 대북제재조치 해제 등의 과제가 중요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북측의 간헐적인 도발은 남한 국민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지난 1일 발표된 한 설문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북한정권 신뢰도 27.5% 불과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전국 16개 시도 19~65세 사이 성인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4 통일의식조사’(표본오차 ±2.8%, 95% 신뢰수준)에서 ‘대북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27.5%가 북한 정권과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전년도 35.8%보다 8.3%나 감소했으며, 2007년 조사 이래 최저 수치로 북한발 안보불안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북한 핵무기 보유에 대한 위협의식을 묻는 질문에 무려 89.3% 응답자가 위협을 느낀다고 답했다. 직전 해보다 10.9% 상승해 역시 2007년 이래 가장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힘을 합쳐 협력해야 한다는 ‘협력대상’으로 보는 응답자는 40.4%에서 45.3%로 증가했으며, ‘적대 대상’이라는 의식은 16.4%에서 13.9%로 감소했다.
이번 설문조사를 맡은 서울대 김병로 교수는 “북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무력도발에 대한 불안의식이 최고조로 상승했다. 그럼에도 북한과 힘을 합쳐 협력해야 한다는 의식이 공존하고 있고, 안보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런 조사결과를 볼 때 북한의 책임있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역할도 요구되고 있다.
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 주도홍 교수(백석대)는 “이제는 한반도 주변국과의 6자회담 재개 문제, 5.24조치 해제 문제와 비핵화 논의, 남북한 교류와 협력은 구분해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며 “유대인과 사마리인이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셨던 것처럼, 이제 원리원칙만 주장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라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번 서울대 설문조사 중 종교와 관련된 내용 중 재미있는 결과가 눈에 띈다.
# 교회가 인도주의 접근 지속해야
최근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는 질문에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기독교(49.4%)>무종교(44.4%)>불교(40.2%)>천주교(37%) 순으로 나온 것이다. 반면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가장 높게 평가한 것도 기독교(79.9%)가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천주교(75.8%), 무종교(75.5%), 불교(70%) 순이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상반된 반응으로 여길 수 있는 결과지만,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남북관계, 한반도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현재는 사실상 중단돼 있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적극 참여해왔던 기독교였던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돌출적 변수가 많다 보니 앞으로 남북한 관계를 섣불리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남북관계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은 분명 있어보인다. 이에 대한 남북한 양 당국의 부담도 적지 않다. 이런 때 기독교계는 통일기반을 다져가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가야 하며, 미리 준비해야 한다.
서보혁 교수는 “평화와 통일을 위해 분열보다 통합을, 갈등보다 화해를 만들어내는 교회 역할이 필요하다”며 “교회가 정략적이거나 정치적인 논리에 휘말리지 말고 인도주의 문제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서 교수는 “남북 관계가 개선될 때를 대비해 북한 각 지역을 종합적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는 비전을 세워두는 것도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조언했다.
이미 한국 교회는 1991년 채택한 남북 기본합의서의 기초를 세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 이른바 1988년 8.8선언이라는 유산을 내놓은 바 있다. 교계 일각에서는 멈춰버린 통일담론을 교회가 다시 이끌어 내야 한다며 남북한 정치적 긴장과 상관 없이 정의와 평화에 기반한 기독교 통일운동을 전개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