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임하옵시며'가 더 나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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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임하옵시며'가 더 나은 번역
  • 승인 2003.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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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성경 번역에 있어서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원본에 대한 번역판의 태도 둘재는 원본의 번역 방법 셋째는 번역판이 현대 독자들에게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는지의 여부이다.

이번 예장통합측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재번역에는 표준 새번역의 입장과 이 문제에 줄곧 이의를 제기해 온 해당 교단의 모 신학자의 견해가 전폭적으로 반영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원본의 번역 방법으로는 크게 형식일치번역(Formal correspondent translation)과 내용동등성 번역(Dynamic equivalent translation)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에 속한 번역들로는 한글개역성경을 비롯하여 KJV, ASV, RSV, NASV 등이 있고, 후자에 속한 번역들로는 NEB, REB 등을 비롯하여 최근에 나온 표준새번역 등이 있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형식일치 번역은 축어적인 말의 일관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문법 구조와 단어 배열 순서, 문장의 길이 등까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내용동등성 번역은 문맥의 일관성에 치중하여 원문의 형식보다는 그 의미를 옮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가장 이상적인 번역은 이 두 번역 방법을 균형있게 조화시켜 원문의 뜻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이해시키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이번 주기도문의 번역은 축어적인 말의 일관성(Verbal consistency)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단지 문맥의 일관성(Contextual consistency)에만 치중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번역 경향은 자칫하면 원문이 제시하는 본래 의미의 한계를 벗어나 임의적인 주석 내지는 자유적인 해석의 근거를 마련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아버지’는 신적 고유명칭
이번 재번역에서는 ‘아버지’라는 명칭을 5번 사용하고 있다. 그 중 2개는 원문에 나와 있지만 3개는 임의적으로 첨가한 것들이다. 즉,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아버지’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문은 ‘수’(당신의)인데, 대부분의 영어 번역판에서는 ‘thy’, ‘your’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재번역위원회는, 아버지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강한 구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결정적인 이유는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한국어 어법에서 불경건한 낮춤말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는 웃어른을 극히 높여 일컫는데 쓰는 제 3인칭 대명사요, 둘째는 ‘하오’할 자리에 상대되는 사람을 일컫는 제2인칭 대명사라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의’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 뿐만 아니라 어법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아버지의’를 첨부하는 것은 어떠한가? 의미상으로는 가능하지만 본문에 없는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큰 부담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으셨던 것을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명목하에 ‘아버지의’라는 소유격을 덧붙인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계 22:18)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나라, 뜻은 ‘아버지의’라는 용어를 붙인다고 그 권위가 높여지거나 그 의미가 강조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명칭은 초월적(‘하늘에 계신’), 내재적(‘우리’) 속성이 합쳐진 하나님의 신적(divine)인 고유명칭이지 값싸게 인용되거나 함부로 남용될 수 있는 인간론적(anthropological)인 용어는 아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제한적 의미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나라를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로 부르고 있다.

물론 ‘아버지의 나라’라는 용어가 나오기는 하지만(마 13:43, 26:29)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요컨대 두 구절에서 아버지의 나라는 미래적·종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기도문에 나오는 나라에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현재적 나라(눅 17:21)도 포함될 수 있다.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아버지의 나라’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 난 문제를 야기시킬 소지를 지니고 있다.

‘나라’(바실레이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지배 및 통치를 의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내 기도에 관계없이 임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것이 나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기도할 수 있다(Luther).

따라서 ‘나라’ 앞에 ‘아버지의’라는 제한 어구를 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불가견적인 주권 통치를 가견적인 공간의 의미로 제한시켜 버린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라가 온다’는 사실이 더 중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로 된 재번역의 원문은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오게 하시며’에 해당되는 ‘엘데토’는 제2부정과거 3인칭 단수 능동태 명령법으로서 직역하면 ‘당신의 나라가 오라’가 된다. 우리 말에는 명령형이 2인칭밖에 없지만 헬라어에는 3인칭이 있어서 그 뜻을 정확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혹 번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어감이나 정서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번역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법적인 주어이지만 인격이 아니므로 ‘오다’, ‘임하다’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서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틀린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행위자(Agent)가 아니라 ‘나라’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나라가 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의인(personification)화된 명칭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로 하여금 오시도록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러한 용법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의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는 현재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가 있다.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는 그의 지상사역과 십자가 및 부활의 구속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는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 초기에 그 나라가 ‘가까왔다’(막 1:15)고 선포하셨지만 바알세불 논쟁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말씀하셨다(마 12:28, 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이루어졌지만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재번역에서 ‘나라가 오게 하시며’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임하게 해달라는 미래적인 의미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비록 만족할만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개역 성경 번역이 아닌가 한다.

#‘임한다’는 수직적 개념이 적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고 하면 ‘온다’보다는 ‘임한다’는 표현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임한다’는 용어는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온다’는 말을 쓰면 오히려 더 어색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나라가 임하옵시며’가 맞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한다면 두 번째 간구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라는 표현이 경건치 못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원문에 없는 ‘아버지의’라는 대명사를 붙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역 성경처럼 생략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생략이 되었다고 해서 이름이나 나라, 뜻이 누구의 것들이냐고 반문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앞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불렀으니 다음에 나오는 이름이나 나라,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들이라고 추측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당신’이라는 인칭대명사가 친구나 부부 사이에서 다정하게 사용되는 친밀한 호칭의 용어가 되어지고 있다.

언젠가 ‘당신’이라는 칭호가 거부감없이 존경어로 사용되어진다면 그 때에는 얼마든지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등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고영민교수 / 천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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