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예술은 삶의 영적 표현 가능성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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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술은 삶의 영적 표현 가능성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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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3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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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그늘에 생명의 빛을, 카이퍼의 개혁주의 미학 (26) - 안용준 목사(목원대 겸임교수)

칼빈주의 예술은 삶의 영적 표현 가능성 열어

중세 이후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예술이 이룩한 발전상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에 관한 수많은 이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칭 위대한 작품들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량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야심찬 예술적 사유들이 진행되었음에도 그곳에는 기독교와 신화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카이퍼에 의하면 기독교세계관 안에서 영광을 바라보며 시대의 변혁을 이룩한 예술은 칼빈주의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배되는 예술의 역사로, 종교와 예술의 결합만을 보여주는 저급한 단계로부터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고 등장한 칼빈주의를 들고 있다.

칼빈주의는 상징적인 생활에서 분명히 의식적인(clearly-conscious) 생활로 발전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을 반영하듯 16세기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좀 더 높은 영적인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카이퍼는 예술에 있어 영적 표현의 가능성을 가져다 준 역할을 칼빈주의에 돌리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카이퍼의 확신에 기초한다. “칼빈주의가 나타났던 모든 나라에는 다양한 형식의 삶의 경향에 이르렀고, 종교의 영역에서 국가의 권력을 제외시켰으며 상당한 정도의 사제주의에 종언을 고하게 했다. 이 결과 칼빈주의는 상징적 예배의 형식을 버리고 예술의 요구에 따라 화려한 기념물로서 표현되는 종교적 정신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생활체계와 문화의 영역까지도 인간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칼빈주의가 관심을 갖는 영역 중, 종교와 예술은 종교개혁 이전에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이제 독자적인 실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얀 스텐, 세례잔치, 1664년.

예술이 절대자와의 관련성에서 자신의 내면적 통일성을 이룩했을 경우, 종교는 예술에 풍족한 동기를 부여하는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은 최고의 발전 단계에 도달했을 때 독자적인 실존을 요구한다. 칼빈주의는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마치 “아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으로부터 사도들로 나아가는 과정”과 같다. 그 결과 칼빈주의의 고상한 노력은 종교와 신적 경배를 감각적 형식에서 점점 해방시키고 그 활기찬 영성을 고무시킬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카이퍼는 상징주의적 예배 형식 안에 예술을 위치시키는 전통에서 탈피하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래서 상징적 예배가 이스라엘에 자리 잡지 않았느냐는 반론에 대해서 그는 단호한 입장으로 반응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더 이상 예루살렘의 기념비적인 성전에서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받으실 때를 예언하셨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카이퍼는 종교와 예술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칼빈주의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종교와 신성한 예배를 감각적 형태로부터 더욱 해방시켰으며 강력한 영성을 고무시켰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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