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 말씀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양쪽에 가는 이가 모두 스승이 된다고 했다. 한쪽의 올곧은 이는 모범의 교사가 되고, 다른 한쪽의 그릇된 이는 경책의 교사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는 인류 만고(萬古)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윤창중님’의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 외교사 아니 야사(野史)에 두고두고 오르내릴 사건사고계의 울트라 파워 빅 이벤트, 멀티히트, 구회말 투아웃 만루 역전 홈런같은 빵꾸똥꾸로 등록될 것이다. 이를 두고 선왕 가라사대, 동판에 기록하여 만세에 길이길이 보전하여 경계를 삼도록 하여라.
멋지게 출발한 한국 최초 여성대통령, 그것도 취임의 축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최초 국빈방문으로 포부도 당당하게 입성한 미국, 자유와 평등의 나라에서 우리 대통령의 입술격인 대변인이 자행한 행동은 ‘19금’ 터부를 일시에 무너뜨린 가십거리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성관련 사건사고가 잦아들고 있지 않아 염려가 되고 있던 가운데 사회지도층, 그것도 청백리의 표상을 보여야할 대통령의 입술이 어쩌자고 세계 정치 일번지에서, 미디어의 촉각이 가장 예민하게 돌아가는 그곳에서 치부를 드러내게 되었단 말인가. 앞으로 ‘윤창중님’을 둘러싼 낯뜨거운 공방이 계속될 것이지만 여기서 각설하고, 이 사건이 우리 교계에 던지는 화살을 냉엄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윤창중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번 기회에 한국 기독교계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성의식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교회 안에서 여성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는 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동안 뉴스에 비친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성추문 사건은 ‘윤창중님’의 해프닝에 비하자면 결코 그 수준이 낮지 않았다. 그래도 대변인은 허리인지 엉덩이인지를 툭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그 어떤 ‘목사님’들은 여성 성도를 툭친 데서 진일보한 수준의 일도 벌이다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우리 안에 죄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 죄성은 언제고 어떤 환경에서 기어올라와 우리를 망신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려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으신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성령강림절이 곧 다가온다. 다시 한번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처절한 죄성을 고백하며, 성령님을 의지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야겠다.
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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