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장로교는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12년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처음 조직된 이후 분열과 성장을 동시에 경험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한국 사회와 함께 호흡했다. 또 한국의 역사적 좌표마다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공유하며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한국 장로교는 다양한 분파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지만, 한국 교회 성도의 70% 이상이 장로교인일 만큼 크게 성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가 곧 장로교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기독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연합사업과 관련한 마찰이 대부분 주요 장로교단 사이의 대립 구도라는 점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현재 한국 교회는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학술 세미나를 통해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국 장로교의 유입과 역사적 기여, 분열과 성장, 개혁과 갱신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지난 100년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한국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개혁과 갱신을 위한 의제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편집자 주>
근본주의ㆍ복음주의ㆍ경건주의 등의 경계선과 신학적 차이 선명하게 밝혀내진 못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 준 초기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 충실한 보수적 선교사들이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미합중국장로교회, PCUSA), 남장로교회(PCUS),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선교사공의회, 연합공의회,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등을 통해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 초기 한국 장로교 신학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와 신학교를 강타하던 시기 한국 장로교회는 보수적인 영미 계통의 신학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됐다. 칼빈 신학에 기초한 한국 장로교회 신학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 초기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이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신학 교육과 연구, 집필 등 전반적인 신학 활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1901년 한국 장로교회 첫 신학교육 기관으로 설립됐던 평양신학교도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첫 번째 한국인 교수 남궁혁 박사가 교수로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이후 1928년에 이성휘 박사가 참여했고, 박형룡 박사는 1930년부터 교수로 활동했다. 송창근, 김재준 박사가 귀국한 때는 1933년이었다.
이상규 교수(고신대)는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한국인들에 의한 신학 활동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며 “1920년대까지의 한국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기 한국 교회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 등 다양한 용어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 내한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로 보수적, 복음적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준하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고수했다.
이상규 교수는 “신복윤은 1938년까지의 한국 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1930년대 이전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 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일관되게 정의내리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미흡하다”며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 신학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해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회 신학이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됐다며 선교사들의 신학은 미국의 근본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홍만 교수(국제신대)는 “김재준은 선교사들이 근본주의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 교리 제일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김재준은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적 태도는 일방적이었으며, 근시안적이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김재준의 주장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은 한국 장로교회를 편협하고, 고집스럽고, 반계몽적이고 교파주의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대다수 보수 신학자들은 한국 장로교회 신학을 근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데 철저했지만,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규 교수는 “성경의 권위, 축자영감설을 지지한 보수 신학은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태도를 보여줬다”며 “초기 한국 교회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됐고, 이런 경향은 그 이후 시대에도 동일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 장로교회 신학적 뿌리와 관련된 논쟁들 가운데 근본주의라는 평가는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과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김홍만 교수는 “단순히 근본적인 교리의 강조와 태도 때문에 근본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으로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서 일어났던 부흥과 같은 것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 초기 신학은 개혁주의적인 특징을 내포하고 있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단순히 보수적 복음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은 신학적 모호성을 갖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 한국 신학자의 주체적 신학연구
193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신학활동이 구체화됐고, 연구와 집필, 신학교육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궁혁, 이성휘, 백낙준, 박형룡,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등이 신학자로 활동했다. 1927년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1935년 박형룡의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되기도 했다. 이상규 교수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연구의 시작이자 선교사 중심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고 평가했다.
1930년 전후해서 신비주의 운동이 대두되기도 했다.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미성숙을 반영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주관적 신령주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것이 입신, 접신, 예언, 분별없는 방언 등 신령주의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었다.
이와 함께 진보신학도 대두했다. 진보적 신학운동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이식해 준 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주장했다. 따라서 보수주의 신학과의 대립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적 기류는 주로 미국 교회의 영향 하에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다.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표인데 1930년대 와서 성경관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났다. ‘완전 영감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비평학도 도입됐다. 이상규 교수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완전 영감설은 한국 장로교회의 양보할 수 없는 기초였다. 문제는 이와 관련된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보다 방어적 성격을 띠게 됐고, 근본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1930년대 이후 대두했던 신학운동은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했으며, 박형룡은 보수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김재준은 진보신학의 중심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의 충돌
진보신학의 중심인물은 김재준이다. 박형룡이 볼 때 김재준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오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했다. 이상규 교수는 “보수신학적 입장에서 김재준의 신학은 장로교 전통과 신학적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해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말 한국 장로교회 신학적 판도는 크게 변화했다.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는 1938년 사실상 폐교되면서 보수주의 신학의 연구와 변증은 제한을 받게 됐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면서 보수주의 신학은 약화했다.
이런 가운데 자유주의 신학은 지경을 넓혀갔으며, 1940년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이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반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한국 교회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도 설립됐다.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 확립을 신학교 설립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해방 후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으로서의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 교육이념을 계승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통해 한국 교회를 쇄신하고자 했다. 초기 교수로 초빙된 대표적인 인물은 박형룡과 박윤선이었다. 그러나 박형룡은 6개월 만에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곧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고려신학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박윤선은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리로 하고,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순수하게 지켰다. 타협주의는 배척하면서 순수하게 칼빈주의 신학을 추구했다. 성경의 권위를 사도적 전통으로 이해하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도 반대했다.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광포하고자 했던 박윤선에 의해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은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와 그 주변으로 계승됐다. 실제로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은 박윤선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한국장로교 신학의 과제
장로교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한국 교회 신학을 전반적으로 주도했다는 것이다. 특히 장로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님 주권과 말씀의 무오성,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은혜의 교리는 대다수 한국 교회를 이끄는 중심 사상이 됐다. 물론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신학적 논쟁은 한국 교회 전체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이 극단적으로 개진됐지만, 한국 교회는 기본적으로 장로교 신학의 흐름에 편승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신학적 경계선을 확정하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문병호 교수(총신대)는 “장로교 신학은 역사적으로 추구되어야 하지만 그 본질은 성경의 가르침 자체와 일치한다”며 “장로교 신학을 수립한 칼빈의 사상을 따르며, 청교도적 삶을 강조하며 철저한 진리에의 변증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신학적 차이에 대해 선명하게 밝히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상규 교수는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신학에 안주해오지 않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개혁주의 교회 간의 연합을 추구하는 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며 “교리적 순결과 정통을 강조하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장로교회도 연합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외국신학의 소개나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학적 자립을 이루는 일도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 개혁파 신학은 항상 성경에 충실한 신학이기를 지향해왔지만 때때로 성경을 잘못 해석해 적용한 경우도 있었다”며 “성경을 보다 잘 해석함으로써 신학과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장로교 신학을 할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지녀야 한다”며 “신조들을 그저 역사적 문서로만 갖고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신조들에 충실할 때 개혁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 한국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 - 장로교회를 돌아본다 ④ 장로교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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