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장로교는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12년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처음 조직된 이후 분열과 성장을 동시에 경험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한국 사회와 함께 호흡했다. 또 한국의 역사적 좌표마다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공유하며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한국 장로교는 다양한 분파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지만, 한국 교회 성도의 70% 이상이 장로교인일 만큼 크게 성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가 곧 장로교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기독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연합사업과 관련한 마찰이 대부분 주요 장로교단 사이의 대립 구도라는 점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학술 세미나를 통해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국 장로교의 유입과 역사적 기여, 분열과 성장, 개혁과 갱신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지난 100년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한국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개혁과 갱신을 위한 의제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편집자 주>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처리 문제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 신사참배 처리 문제가 단초
출옥 성도들과 망명했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교권주의자들(신사참배자, 친일파, 자유주의신학자 등등)은 출옥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오히려 출옥 성도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해 교단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신사참배를 정당화했고, “신사참배는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이라는 등 변명에 급급했다.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인해 1952년 고신 교단이 분열한 후, 1953년 기장이 분열했다. 1959년 통합측과 합동측이 크게 분열한 이후 1979년 합동측이 또다시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장로교단은 200개가 넘을 정도로 분열을 거듭했다. 해방 이후의 장로교회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고신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자 처리 문제였다. 두 번째 기장 분열은 신학적 차이였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 교리에 대한 차이로 인해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징계하자 기장측이 분열했다. 세 번째 분열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rch Council) 가입에 대한 입장차에서 비롯됐다. 이로 인해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열됐다.
한국 장로교의 분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지역주의 논란이다. 호주 장로교 선교 구역인 경남을 중심으로 기장측이 분열했다. 합동측은 1979년 경상도·평안도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와 전라도·황해도 중심의 비주류로 분열했다.
# 어떤 분열도 정당성 없어
장로교단의 분열에 대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교수는 “교회의 분열은 성경이나 역사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며 “교회 연합은 주님의 기도 제목(요17:11)이었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었다(엡4:3). 이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그리스도가 한 이신 것과 같이 교회도 하나’라는 주장을 통해서도 드러난다”고 말했다.
특히 “칼빈은 순수성에 대한 논란,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고 소개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로교의 하나 되고자 하는 전통은 초창기 한국 교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는 한국 교회를 하나로 세우기 위해 1893년 1월 “장로정치 형태를 취하는 선교부공의회”를 구성했고, 1901년 9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를 받아들여 ‘장로교 공의회’를 만들었다. 당시 그들은 한국 땅에 자기 교파에 속한 교회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4개 교단 지도자들은 신앙적 전통의 차이에도 한국 땅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성경의 교훈과 장로교 전통에 따르면서 동시에 한국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어떤 명분으로도 교회 분열을 합리화할 수 없고, 분열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분열 중에도 성장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 중에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뤘다.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분열하는 와중에도 일선의 목회자들은 교회에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념 대결로 남북이 나누이고 6.25가 발발하여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려왔을 때 장로교도들은 부산의 초량교회에 모여서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또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구제 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장로교회는 교회 개척과 선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4년에 모인 제 42회 총회는 교회가 없는 500개의 면에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고, 1955년 총회는 태국에 김순일과 최찬영 선교사, 1956년 총회는 대만에 계화삼 목사와 정성원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교회 합동 운동도 전개했다. 1960년 9월 숭동측과 고신측이 합동을 결의하고 10월에 합동 총회를 구성했고, 1962년에는 통합측과 합동측이 합동 원칙을 채택하고 1968년에는 양 총회 합동 위원이 만나 합동에 합의했지만 교권주의와 이해관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인 후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지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교단을 넘어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초교파적 연합 활동을 했다. 통합측은 기장과 함께 KNCC 중심으로, 합동측과 고려측은 보수적인 교회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진보와 보수로 나뉜 활동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장로교 내 보수파는 정교 분리원칙에 따라 1960년에 일어난 3.15 부정 선거,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 1972년의 유신 헌법 통과 등에 대해 침묵했다. 진보파는 정치만이 아니라 노사, 인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진보적인 장로교도들은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1987년 군사 정부가 막을 내리게 됐다.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난 대중 집회 운동도 장로교 성장에 큰 몫을 차지했다. 1965년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의 제안으로 통합측 한경직 목사, 합동측 김윤찬 목사, 감리교 홍현설 목사 등은 전군신자화운동을 시작했다.
또 1973년 빌리 그래엄 전도 집회, 1974년 엑스플로74, 1977년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특히 엑스플로74 집회에는 650만 명이 참석했다. 세계 선교 운동도 크게 일어났다. 1979년 93명이던 선교사는 1990년 687명, 1994년 3,272명으로 증가했으며, 2002년에는 1만 명을 넘어섰다. 대중 집회 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1970년대 헌금액, 신자수 등에서 최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1979년 이후 장로교가 사분오열 되면서 1980년 이후 쇠퇴기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