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과 이미지의 문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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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과 이미지의 문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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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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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운 신학자(3) - 안용준 목사(목원대학교 겸임교수)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미지의 문제 (3)

10월 31일은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Alleheiligenfest, 11월 1일) 바로 전날이었다. 11월 1일에는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신앙심과 열정을 모아 수집한 성유물 수천 개가 성 교회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다.

이 화려한 축제를 위해 독일 전역에서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서 비텐베르크 시 교회의 설교가인 루터가 면죄의 효력에 대해 설명을 해 줄 것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루터는 11월 11일부터 이 논제를 외부에 보내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뉘첼이 12월에 독일어로 이 논제를 번역하였다. 루터의 이 논제는 루터가 생각지도 못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에 연이어 계속되는 루터의 운동에 시각예술은 깊이 관여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에게 있어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확신케 하는 감동의 사건이었다. 그는 평소 성경 예술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 젤란트를 여행할 즈음, 고국에서 들려오는 천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소식은 뒤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그로 하여금 루터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루터의 성경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한 회화의 세계가 뒤러의 머리에 보다 상세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의 화가, 뒤러의 기도하는 손

또한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에서 한 몫을 담당하여 흔히 종교개혁의 화가로 불리는 미술가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er Altere, 1472-1553)이다. 크라나흐는 루터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그림제작을 통해 그의 가르침과 사상이 신속하고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활약하여 독일의 루터교가 자리 잡는 일에 기여 하였다.

1500년 무렵 북유럽에서 꽃피운 시각예술은 루터의 신학적 미학의 견해를 반영하였다. 종교개혁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독일에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한스 발둥 그리엔, 한스 홀바인 그리고 조각가인 틸만 리엔슈나이더 등은 이 예술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겨우 상징의 사용만을 허용함으로써 이미지 사용에 관한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던 반면, 루터는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미지의 종교적 사용을 지지하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예술이 이렇듯 존립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그것은 루터가 소유하고 있던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경적 지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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