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 (93) 아시리아의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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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 (93) 아시리아의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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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2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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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호세아 통치 제7년경부터 아시리아 군대가 자주 사마리아를
공격했으며, 그 결과 호세아 제 9년에 항복을 받아냈다.

코간은 열왕기상 16:10~18절의 기록 가운데 제물을 불사르고 피를 단 위에 뿌리는 의식(15절)은 아시리아의 제의와 다른 것이며, 아하스가 다마스쿠스에서 보고 새로 지은 제단은 메소포타미아의 제단이 아니라 아람의 제단이었다고 주장한다.


19~20절은 다른 왕들의 통치기록을 마감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아하스의 업적이 유다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가 장사되고 히스기야가 그의 뒤를 이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하 17장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와 왕국 멸망 이후의 사마리아의 상황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하 17:1~6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1절에 의하면 유다 왕 아하스 통치 제12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9년간 통치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2절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한 왕이었지만 그러나 그 이전의 왕들과는 달랐다는 평가이다. 3~4절에 의하면 그가 이전 왕들과 달리 아시리아의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것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가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종교적인 자주를 이룬 왕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3절에 의하면 아시리아의 왕 살만에셀 5세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그는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구약성서의 많은 구절에서 '올라오니'라는 표현은 무력침략을 포함한 군사 행동을 의미한다. '종이 되어 조공을 드렸다'는 기록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으로서 매년 정기적으로 드려야하는 조공을 드렸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기로 한 이상 다른 아시리아의 동의 없이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따라서 4절에서 호세아 왕이 그의 사신을 이집트의 왕이었던 소(So) 왕에게 보내고 매년 드리던 조공을 드리지 않은 것은 아시리아 왕에 대한 명백한 반란이었다. 따라서 살만에셀 5세는 군대를 보내 호세아 왕을 옥에 감금하였다.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도움을 청했던 이집트 왕 소(So)는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 두 가지로 대답 할 수 있다. 첫째 소 왕은 이집트 제 24왕조의 테프나크테 1세(Tefnakte I / 주전727-720)이다. 이렇게 주장 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이집트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제 24왕조가 이스라엘을 도울 여력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는 제24왕조의 중심지였던 세이스(Saies)와 언어학적으로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 소 왕은 제 22왕조의 오소로콘 4세(Osorokon IV/ 주전 730-713년)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제22왕조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틴)과 인접해 있으며, 시삭 때부터 관계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소를 오소로콘 4세라고 본다. 이 두 견해가 다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이집트의 소 왕이 누구이든 호세아가 이와 외교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 아시리아에 대하여 반란을 한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에 있어서 봉신의 종주에 대한 반란이란 무력시위보다는 해마다 드리던 조공을 드리지 않고, 또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아시리아의 보복이 4~5절에 기록되어 있다. 즉, 배반한 호세아를 가두고, 사마리아를 포위한 것이다. 그런데 5절에 의하면 삼년 간 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절의 3년이란 정확하게 3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하였다는 의미이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원정군이 삼년 동안 어떤 한 지역을 포위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군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군대를 장기간 포위하는데 운용할 수 없다. 또한 아시리아의 군대는 원정을 떠났다 하더라도 신년제의 축제 전에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5~6절의 의미는 호세아 통치 제7년경부터 아시리아 군대가 자주 사마리아를 공격하였으며, 그결과 호세아 제9년에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6절에서는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즉, 고산 강가, 할라, 하볼 그리고 메대 사람들의 고을로 이주하였다. 고산강가(Gozan)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위치한 성읍이며, 이곳에 하볼 강이 흐르고 있다. 강제 이주(deportation)는 아시리아가 전형적으로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첫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인적자원(manpower)을 공급하기 위한 방법이고, 둘째는 점령지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고위 관리이거나 혹은 기술을 가진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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