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대부분의 고대 전쟁에서 왕은 전쟁에 출정하지 않고 왕궁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관습의 일환으로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고대 전쟁의 관습에 의하여 다윗이 암몬과의 전쟁에 출정하지 않은 것을 다윗의 실수나 혹은 잘못된 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2절은 ‘저녁 때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레브는 해가 지고 밤이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때 예루살렘은 저녁 바람이 불어 매우 선선한 때이다. 따라서 2절처럼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거닐고 있었을 때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많은 이야기처럼 이 다윗과 밧세바의 만남도 우연한 만남이었음을 보여준다.
2절의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월경 후 정화하는 목욕인 듯하다. 2절은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왕궁은 2층 이상의 옥상이 있는 건물로 여겨진다. 지중해 지역의 많은 가옥이 지붕 위의 옥상을 만들어 저녁시간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고, 경우에 따라 여름철인 경우에는 손님이 옥상에서 자기도 한다.
3절은 그 여인의 신상명세서이다. 즉, 엘리암의 땅이며, 헷 사람으로 다윗의 군인으로 있는 우리아의 아내였다. 우리아의 아버지 엘리암의 이름은 사무엘하 23:34절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에 기록된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으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만약 이 두 엘리암이 같은 사람이라면 엘리암은 같은 다윗의 용사였던 우리아에게 자신의 딸을 준 것으로 보인다.
4절에서 다윗은 전령을 보내어 밧세바를 데려오게 한 후 그녀와 동침하고 그녀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4절의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라는 표현은 월경 후 정화의식 후라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밧세바가 임신할 수 없는 때라는 뜻이다.
그러나 5절에서는 그 결과 밧세바가 임신을 하였고, 이 사실이 다윗에 알려졌다. 이러한 다윗과 밧세바의 행동은 신명기 22:22절에 기록된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밧세바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신명기 22: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뿐만 아니라 왕인 다윗은 율법 밖(extra legem)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밧세바에게는 매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6절의 다윗의 반응은 자신에게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요압에게 기별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자신에게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7절에서 우리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다윗은 요압의 안부와 전선의 상황에 대하여 물은 후 다윗은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고, 그를 위하여 음식물을 밧세바에게 보냈다. 8절의 “발을 씻으라”는 말의 의미는 여행 후에 항상 씻는 것이다. 즉, 먼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발을 씻으며 쉬라는 뜻이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이 집에서 쉬면서 음식과 술을 마시고, 그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숨기기 위하여 꾸민 계략이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궁 주변에 머물고 있는 군인들과 함께 지낸다. 이러한 사실이 다윗에게 보고되자 다윗은 10절에서 우리아에게 길을 갔다 돌아온 자가 왜 집으로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11절에서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라고 대답하였다.
11절에 의하면 암몬과의 전쟁에도 법궤가 전선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법궤가 전장으로 옮겨진 것은 전쟁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11절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숙곳(Succoth)에 있고’라고 번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