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바른 신앙 회복하고 하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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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바른 신앙 회복하고 하나돼야 한다"
  • 승인 2002.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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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진지한 자기 성찰이 없이는 성장둔화는 물론 질적성숙에 있어서도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소리가 높다.
교회에 대한 대외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무사안일과 과거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대해 전병금 목사(강남교회)는 ‘부실한 신학이 문제’라며 하루속히 한국 교회가 신학적 혼돈을 극복,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깨달아 신자들이 사회생활에서 성경적 삶을 구현할 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미지가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텐데 이대로 가다가는 교회의 존재의미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아질 것 같은데요, 무엇이 문제이며 그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건강한 교회, 성숙한 교회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를 바로 세우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일정한 ‘신학적 수준’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신학 부재’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부실한 신학교육으로 부실 목회자가 생기고 그 결과 부실 교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하루 속히 이같은 신학적 혼돈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칼 바르트는 신학의 역할을 첫째, 설교가 진리와 순수성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독하고 둘째, 교회 복음선포를 성찰하고 비평적으로 코멘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말씀의 선포가 성경의 증언에 성실한가 시험하는 일을 신학이 하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 점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에는 수준 높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수준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의 신학적 수준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교회의 목표가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목회자나 교회 중심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개혁정신이나 선교 열의가 식어가고 현상유지에 급급하여 교회의 존재 자체를 위한 몸부림에 그쳐버리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보다는 교회 자체에 대한 관심, 즉 자체 유지를 우선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사랑’과 ‘섬김’인데 교회가 여기에 소홀히 한다면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노력해야 할 과제는 신학적 수준을 높이면서 한편으로는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교회와 신자의 수가 많은데도 대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고 불신당하고 있는 이유는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행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을 함께 강조해야 하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은 강조하지 않거나 행함만 강조하고 믿음은 소홀히 하는 경우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기독교인에게는 행함으로 인한 윤리·도덕적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내세만 강조하고 현실에서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강조하는 데 소홀하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행함’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목표는 하나님 나라이며 사역의 형식은 ‘섬기는 종의 모습’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사역에서 ‘섬김’, ‘생명’은 ‘죽음’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그밖에 ‘한 알의 밀알’ 비유 등이 사역의 정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는 놀랍게 변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킬만한 ‘삶’을 실천하는 데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장)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고백은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습니다.

이같은 고백적 다짐을 ‘엘리옷’은 ‘정치적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데 기독 정치인은 어떻게 정치를 펼 것인가, 기독 법조인은 어떻게 법을 집행할 것인가, 기독 언론인은 어떻게 정론을 펼 것인가, 교육자와 문화·예술인은 어떻게 정치적 영성을 통해 암울한 사회 한복판에서 양심세력으로, 도덕적 표준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포괄적으로 일깨워줍니다.

-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하나되는 운동의 핵심에 계신데 ‘한국기독교연합을위한준비위원회’의 근황과 전망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세계는 토플러가 21세기를 특징지은 것처럼 ‘일치·통합의 시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남북문제도 통합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같은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도 하나가 되기 위해 2000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안에 ‘한국 교회 연합추진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협이나 한기총 등의 기구통합이 현재로서는 어렵기 때문에 한국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국 기독교 연합을 위한 준비위원회’(2000. 7.6.)를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계속 일을 진행해 오다가 ‘한국 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2001. 12)가 태동된 것입니다. 교단장협의회에서는 일치운동의 방향을 정하고 준비위원회에서는 이 운동을 구체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앞으로 남북통일에 대비한 북한 선교를 비롯해 세계선교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바른 언론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언론 매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의 가치관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 기독 언론의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기독 언론은 ‘정론’을 펼쳐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문들이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면서 안주하려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옳고 그름을 바로 지적하는 언론의 사명을 다할 때 한국 교회로부터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둘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학적 관점을 바로 세우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그밖에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교회일치를 지향하며 교회가 부단히 갱신해 나가도록 건전한 비판과 견제·협력으로 잘 균형잡아 나가야합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는 부각하고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향한 사명도 중차대합니다. 오늘날처럼 가치관이 전도되고 물질만능과 개인주의가 팽배해가는 시대 속에서 사회의 양심을 지켜주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절망한 사회에 희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 언론이 건실하게 육성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책임도 큽니다. 바르게 사명을 수행하는 기독 언론은 적극 성원하고 건전하지 못한 언론은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건전한 언론을 보호·육성하는데 교회의 책임이 막중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병금목사(강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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