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아무것도 모르던 처녀는 그저 믿음 좋고 말만 잘 통하는 사람이면 좋았다. 중매로 만난 남자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말이 잘 통했다. 사진만 보고도 결혼하던 그 시절, 보름만에 치러진 결혼식은 그녀의 삶을 사모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던 결혼생활이었지만 마냥 행복했다. 첫 아이를 낳고, 또 둘째를 낳고 시골교회를 옮겨 다니며 목회할 때 넉넉지 않은 형편이어도 이들 부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먼 하늘을 바라보는 김정미 사모의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다.
“우리 목사님, 욕심이 많았어요. 시골 목회였지만 성전을 두 번이나 건축했고 사택도 지었어요. 영광에서 사택까지 다 짓고 나서 이제 고생이 끝나나 했는데, 그만….”
막내가 뱃속에 있을 때였다. 10여명 남짓 되는 시골 성도들과 알콩달콩 어울리며 행복했던 시간이 끝나버렸다. 40대 초반이었던 남편이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교회건축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이겨내기 힘든 병마가 남편에게 찾아들었다. 큰아이 겨우 2학년이었고 작은 딸은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였다. 늦둥이 막내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김정미사모는 당황했다.
‘기도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항암치료도 효과가 없었고 병세는 점점 악화돼 기도원으로 살 곳을 옮겼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2년을 더 살다 하나님 품으로 떠나갔다.
홀로 남겨진 사모에게 삶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시골교회 성도들이 사모님이 교회를 맡아 달라 부탁했고 호남신학교를 다니며 뒤늦게 신학과 상담을 공부하며 전남 영광에서 4년을 버텼다. 어려웠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제 자식 같았어요. 물론 연세들은 많았지만 제가 일일이 보살피고 보듬어야할 성도들이었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감사했고 목회하며 공부하는 삶이 고단치 않았어요. 그렇게 계속 있을 줄 알았는데 인생은 제 생각대로 되지 않더군요.”
어느 새해 아침,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할아버지 집사님 한 분이 대뜸 “전도사님, 이제 우리 교회를 떠나주세요!”라고 통보했다. 마음이 약했던 김사모는 자신을 반대하는 성도가 있는 곳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후임을 물색하고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이 남아 주기를 희망했지만 자신의 설교에 냉담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한 명의 성도가 있는 한 더 이상 목회는 힘들었다. 그렇게 영광을 떠났다. 사실 별 이유도 없었다. 예배를 마칠 때 축도를 받고 싶은 연로한 성도의 마음일 뿐이었다.
어린 세 딸을 데리고 인천으로 온 김정미사모가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편의 목회를 내조하는 것 이외에 단 한 번의 사회생활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택한 일이 자활근로. 조건부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일을 시작했다. 택배와 월간지 배송, 청소 등 구청에서 맡긴 일은 안 해본 것이 없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자활근로는 힘들지만 김사모 가족의 생계를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고단했을 삶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하다. 이유가 뭘까?
“감사하죠.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할머니들 만나 이야기 하면 제 마음이 푸근해져요. 일부러 찾아다니며 봉사도 하는데 좋은 일시키고 돈도 주니 얼마나 감사해요.”
3년 전부터 만월복지관에서 재가 장애인 도우미로 활동하는 김정미사모는 올해부터 노인 재가 복지 사역을 맡아하고 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필요를 채워준다. 말벗이 필요한 노인에게는 친구가 되어주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만나면 청소부터 목욕까지 시켜준다. 욕창에 걸린 노인이라도 있으면 빨래에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도 재가도우미의 몫이다.
이런 엄마를 보고 살아온 딸들은 학원 하나 보내지 못했는데도 한동대학교에 척하니 입학해 벌써 4학년, 2학년이다. 지금 김정미사모의 유일한 고민은 사춘기에 접어든 막내딸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홀로 강아지를 벗 삼아 집을 지키고 있는 것. 그러나 그마저도 김사모에게는 감사의 제목이다.
“처음에는 왜 학교생활도 못하고 저러나 속상했는데 다 내려놓고 나니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만도 어딘가 하는 마음이 들어요. 그동안 제 아이들 모두 하나님이 키워주셨는데 막내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겠어요?”
뱃속에서부터 아버지의 병고로 사랑받기보다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았을 막내에게 엄마는 늘 미안한 마음이다. 아이들 유치원이라도 마치고 남편이 떠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한두번 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도 잘 알지 못하는 코흘리개 아이들과 살아왔을 지난 시간이 어찌 쉽기만 했을까.
“저는 그래도 목사님과 사별 후 4년이나 교회에 남을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장례를 치르고 사택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처지에 처하신 분들도 많아요. 거처도 없고 생계비도 없고 거기에 아이들 교육비도 없으니 경제적인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 하지만 홀사모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영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거예요. 사모도 평신도도 아닌 정체불명의 사람으로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며 떠도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정미 사모 역시 인천에 올라온 후 여러 교회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그에게는 영적인 안식처가 없다. 사모의 신분을 속이고 그냥 평신도라고 말을 해도 그에게서는 평신도와 다른 믿음의 깊이가 느껴졌다. 사모에서 평신도의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고 싶지만 오히려 교회는 사모를 성도로 두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고향을 떠나지 않더라도 전임 목회자 가족이 계속 출석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후임 목회자도 있고, 여러 이유로 홀사모들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 채 영적인 방황을 계속하게 된다.
갑자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한 달을 내리 일해도 아이들 학원비조차 마련하기 어렵고, 영적인 휴식처도 찾기 힘든 홀사모의 삶은 이처럼 고단하기 그지없다.
한 해의 마지막 달, 김정미사모는 자활근로를 나섰다. 동암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도착하는 인천의 끝자락. 어디 집이 있을까 싶은 판자더미에 작은 방 한 칸이 숨어 있었다. 온기 하나 없는 방. 그 곳에서 만난 84세의 이순화할머니(가명)는 딸이 찾아 온 듯 반갑다.
“할머니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우리 이번 달이면 일이 끝나요. 한달 쉬고 내년에는 어느 동네에 배치 받을 지 모르겠네.”
정든 딸을 떠나보내는 할머니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역력했다. “매년 사람이 바뀌는데 다 똑같을 것 같지만 정이 가는 사람이 따로 있어. 큰 에미, 작은 에미(황해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봉사자들을 큰에미, 작은에미라 불렀다)가 계속 오면 좋겠는데.”
“이 달 가기 전에 또 올 거에요. 목요일에는 병원에 모시고 가고 금요일에는 복지관에 오셔서 머리 파마 하셔. 그럼 우리 두 번은 더 볼 수 있네.”
할머니는 마당 앞까지 나와 ‘에미’들을 배웅했다. 할머니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봉사자 김정미 사모는 “교회 안에만 있었으면 못 보았을 세상을 하나님이 보게 하셨다”며 또 감사를 늘어놓았다.
“소망이요? 남편의 장례를 치르던 날 목사님께서 이 땅 보다 더 좋은 천국을 예비하신다며 하늘 소망을 설교 하셨죠.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울지 않았고 먼저 간 남편 목사님을 원망한 적도 없어요. 하나님의 뜻 없이 이뤄지는 일이 있나요. 말씀을 의지하며 부르심따라 살아갈 뿐이죠. 그렇게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요. 그래서 행복합니다.”
교회 밖으로 나서면 성도들에게 금세 잊혀지고 마는 눈꽃 같은 존재, 목회자 유가족. 힘들게 인터뷰에 응한 김정미사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모들이 있다는 것을 교회가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