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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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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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0.2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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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금 목사<강남교회>

최근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언행에 대한 국가 보안법 위반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 때문에 정국이 시끄럽다. 필자가 보기에 강교수의 발언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올바른 생각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언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말과 글 때문에 이렇게 여야가 충돌할 정도의 문제인가 하는데는 의구심이 든다. 이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 많은 인권문제를 야기시킨 국가 보안법에 대한 문제이다.

성경에서도 실정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루는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들이 예수께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마 22:17)고 난처한 질문을 했다. 그때 그들은 예수로부터 어떤 고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에 가시 같던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만일 예수가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동행한 헤롯당원들을 증인삼아 로마에 고소를 할 것이고, “바치라”고 하면 예수를 매국노로 몰아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이런 뻔한 질문을 간파한 예수께서는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고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마 22:20)고 물으시더니,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하셨다.

그동안 세계 기독교는 이 말씀을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가이사를 동등한 비교대상으로 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 있다. 이 세상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가이사라는 세속적인 권세도 하나님의 것이다.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것이지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상위법과 하위법이 마찰을 빚으면 상위법이 하위법에 우선하듯이, 국가의 명령이나 법이 하나님의 법에 위배될 때에는 그것을 지켜야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권력이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나라의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존속되었던 국가보안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으로서 폐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냉전을 빌미로 국민의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허용하지 않은 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방해해 온 대표적인 반민주적, 반인권적 악법이다.

이 법의 논리는 단순한 흑백논리에 불과하다. 이북의 주장은  그 타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악’으로 규정되고, ‘반공반북과 친미사대’만이 절대적 ‘선’인 것이다. 이러한 법이 존속되는 한 왜곡된 한국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국민들의 진지한 토론마저도 불온하고 불법적인 것으로 정죄 당할 뿐이다.

국가보안법폐지는 이러한 강요된 최면상태를 깨고 국민의 기본권보장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지름길인 셈이다. 지금은 군사정권시대처럼 남북상황을 악용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누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강변하는 시대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법, 즉 인권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유지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똑똑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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