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스쿨은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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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스쿨은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5.03.1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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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㉜ 대를 이은 조선 사랑 ‘윌리엄 앨더만 린튼’

윌리엄 앨더만 린튼(Willian Alderman Linton 1891~1960, 인돈)은 전남 복음화의 씨앗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이면서, 아들과 손자들까지 이 땅에 남아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도록 신앙 유산을 남긴 영원한 교육자이자 선교사였다. 

특별히 린튼은 군산 영명학교, 전주 신흥학교 등 미션스쿨에서 신앙교육으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이 군산 만세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린튼이 있었다. 해방된 조선에 돌아온 린튼은 무너졌던 선교 기반을 다시 일으켰고, 한국전쟁 후에는 한남대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끈질긴 열정과 원칙은 오늘날에도 위협받고 있는 기독교 신앙교육이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주는 듯하다.

남장로교 최연소 선교사 
린튼은 1891년 2월 미국 조지아주 토마스 빌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행복한 성장기가 있었지만, 형제들을 모두 전염병으로 잃고 부모마저 이혼하면서 암울한 시간이 계속됐다. 

가족을 잃은 린튼이 붙잡은 건 신앙이었다. 교회학교 교사였던 신시아 맥린이 곁에 지켜주었고, 선교사의 꿈도 그때 품게 됐다. 린튼은 17세 때 명문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 졸업할 정도로 명석했다. 당시 최고의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 입사가 보장됐지만, 그의 선택은 선교사 파송이었다. 

결정적으로 안식년 차 방미 중이던 프레스턴 선교사의 도전이 중요했다.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며 빠르게 부흥했고, 선교사가 절실했다. 그렇게 린튼은 1912년 4월 파송 선교사로 임명됐다. 당시 나이 21살, 남장로교 파송 최연소 선교사였다. 린튼은 그해 8월 애틀란타를 출발해 덴버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9월 20일 목포에 도착한다. 
남장로교 조선선교회는 린튼의 첫 사역지로 군산을 지정했다. 그는 빠르게 조선 말을 익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평범한 교사 선교사로 사역하던 그는 1917년 전임 선교사가 갑자기 사임하면서 교장에 취임했다. 26세 청년에게 무거운 자리였지만 성실하게 맡겨진 직임을 감당해냈다.

만세운동 기여, 건국훈장 애족장
“그것은 폭력 없는 혁명이었습니다. 3월 1일 각 지역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나와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무질서나 폭력이 없었고, 조선인들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봉기는 온 나라에 걸쳐 일어났고 일제는 행진하는 사람들을 제압하고 짓밟았습니다.”

린튼은 1919년 군산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일제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기 원하지 않던 다른 선교사 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기독교인 중심의 군산 만세운동은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이었고, 연인원 3만7천명이 참여할 정도로 열띠게 진행됐다.

1919년 5월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린튼은 미국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서 3.1운동의 실상을 만천하에 고발했다. 린튼의 선교 보고를 다룬 보도기사가 신문에 게재되면서 3.1운동의 실상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공로를 인정해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린튼은 첫 안식년 기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하고 뉴욕성경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또 이 기간 조선 선교로 이끌어준 프레스턴의 소개로 유진 벨의 딸 샬롯과 본격 교제를 시작해 1922년 일본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미 남장로교 최연소 선교사로 내한한 린튼은 48년 동안 이 땅의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는 데 공헌했다. 사진은 두 번째 안식년을 미친 후 지리산 선교사 캠프를 찾은 린튼 부부와 네 명의 아들.

48년 열정 쏟았던 신앙교육
조선총독부는 끊임없이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위협했다. 우민화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사학법을 계속 개정하면서 성경교육과 종교활동을 막기 위한 시도를 거듭했다. 1919년 이후 교육정책이 완화되는 듯 했지만,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며 일제의 교육방식을 미션스쿨에 이식하고자 압박했다. 

기독교 정체성에 입각한 교육을 포기할 순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일제 교육당국과 맞선다면 학교 운영도 어렵고 학생들의 피해도 불을 보듯 뻔했다.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린튼은 항상 “미션스쿨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제의 교육은 일황 숭배자로 길러내려는 의도”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도입한 ‘지정학교’ 제도에 주목했다. 1923년 본격 시행된 지정학교는 기독교 교육이 가능하면서, 인가받지 못한 학교가 받을 불이익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물론 정식 인가보다는 덜하지만 지정학교 인가도 막대한 재정은 필요했다. 

이에 남장로교는 선택과 집중 전략처럼 전주 신흥학교와 광주 수피아여학교만 지정학교 신청을 위해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사역지를 전주로 옮긴 린튼은 신흥학교가 지정학교로 선정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매진했다. 그리고 온갖 난항을 이겨내고 린튼은 1932년 지정학교 인가를 받아 낸다. 린튼의 끈질긴 노력과 꼼꼼한 준비가 아니었다면 이루기 힘든 결과였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린튼은 1928년부터 다시 한번 안식년을 갖게 됐고, 2년 만에 컬럼비아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학고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도 6주에 한번 정도 가족들과 만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1930년 목사안수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교장 업무에 복귀했고 지역 교회 목회까지 능력있게 감당했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 여파로 조선 선교비가 크게 줄었지만, 그는 기독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이런 과정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취득한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36년 일제는 미션스쿨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의무를 노골화했다. 린튼은 선교사들을 대표해 조선총독부 당국자들과 꾸준히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실패했다. 남장로교의 신사참배 거부 원칙은 확고했다. 결국 그해 11월 남장로교는 신사참배 상황에서 기독교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학교 폐쇄를 결의했다. 

린튼은 학교 폐쇄를 위한 위원회 책임자가 되었다. 기독교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책임을 다했다. 학교가 없어졌지만 그는 1940년 사실상 추방될 때까지 시골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양육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남장로회는 선교스테이션과 미션스쿨 재건에 나섰고 린튼은 1946년 조사위원 자격으로 빠르게 전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새로운 교육 사명이 주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린튼은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956년 오늘의 한남대학교를 대전에 세운다. 
3차례나 암 수술을 받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한남대 초대 총장을 맡아 학교 안정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1960년 8월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아버지의 선교 사명은 셋째 아들 휴 린튼, 넷째 아들 토마스 린튼에게 이어졌고, 휴 린튼의 아들 중 데이비드와 스티븐, 존도 여전히 한국에서 뜻있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백석대 이상규 명예교수는 “린튼가의 4대에 걸친 사역은 우리나라 교육과 여러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48년 동안 사역한 린튼 선교사는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하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 공헌했다. 남장로교 선교 운동과 선교자원 동원에도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라고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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