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 운동 확산, 세계복음화의 꿈으로까지 발전
미처 한국전쟁의 상흔이 다 아물지 않은 1970년대의 한국은 혼란과 기대가 공존하던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남북의 긴장이 여전히 팽팽한 가운데 군사정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경제발전’이라는 구호를 부르짖고 있었다.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엑스플로 ’74 대회는 그런 시대의 파도 한가운데서 개최됐다. 아신대 명예교수 박응규 박사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과 같이 성령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던 1974년 은혜의 현장을 다시금 조명한다. 여의도에 모인 수많은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며 우리나라의 운명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했다. 전도 훈련생만 30만여명이 배출됐고 일일이 세기도 힘든 수의 결신자가 나왔다. 대회의 감동은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와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로 이어졌다. 오늘날 개신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게 된 것에는 엑스플로 74의 영향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규모가 전부는 아니다. 숫자는 많아진 반면 신뢰도는 최하위로 추락했고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을 재설정해야 할 지금, 엑스플로 74에서 외친 순수한 복음의 가치를 우리는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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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도약을 위한 진통을 겪으면서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에 놓여 있었다. 남북분단의 긴장 국면에서 6.25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군부 통치 시대 속에서 경제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라는 과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서구에서 이룬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진행될 수는 없었고 한국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1970년대 한국은 경제와 정치의 총체적 문제를 안고 미래를 개척하던 시기였다고 특징화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엑스플로 ’74 대회는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경험하던 상황을 잘 극복하고 한국 민족과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한국교회와 선교역사에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한국교회 평신도운동의 토대와 교회연합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70년대는 한국사회의 중산층이 확산되고 있었고, 엑스플로 ’74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을 활성화하고 동력화하여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연합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교회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대회를 통해서 모든 성도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계승하여 평신도운동이 다방면으로 확산될 수 있는 토대와 함께 한국교회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엑스플로 ’74는 한국교호의 대중전도운동과 교회성장의 기반을 조성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선교역사에서도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 엑스플로 ’74는 이전의 전도대회의 결과를 흡수하여 이후의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와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의 기반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성장과 세계선교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또 한 차례 놀라운 교회부흥과 획기적인 교회성장을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획기적인 성장은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나 엑스플로 ’74 대회가 민족복음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김준곤 목사는 전도 없는 부흥은 존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대회가 폭발적인 교회 성장으로 이어진 것은 단순히 집회로만 끝나지 않고 전도 요원들에게 철저한 전도훈련을 실시하고 또한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한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엑스플로 ’74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한국 민족복음화 운동을 결집하여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본격적으로 세계선교운동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는 민족복음화운동에 있어서 핵심전략이 되었고 한국교회와 사회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캠퍼스복음화운동이 더욱 가속되었고, 민족의 입체적 구원, 즉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복음주의적 관심을 증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김준곤 목사의 영향력은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민족복음화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열정적 신앙을 품게 했으며, 한국 CCC의 중심된 구호가 된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비전은 그들의 마음에 새기며 국가적 구원관을 형성케 하였다. 엑스플로 ’74는 민족복음화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세계복음화운동의 꿈을 가지고 도전하면서 춘천성시화운동, 80세계복음화대성회, ’84세계교회기도대성회, 뉴라이프2000마닐라대회 등을 주도해나가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보다 강력하게 확산시켜 나갔다
이렇게 엑스플로 ’74는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갈망,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났던 EXPLO ‘72와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등이 연계되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김준곤 목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피 묻은 복음”으로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희생으로 우리가 복음을 받았으며, 그 복음을 위해 피 흘리는 정신으로 살아야 하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외치며 평생을 살아갔다. 그는 순교적인 각오와 자세로 민족복음화운동에 매진해 왔으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피 묻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값싼 복음을 전한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값싼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시대적 선지자의 역할도 잘 감당하였다.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그가 그토록 외쳤던 순수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인의 가슴마다 피 묻은 복음이 심겨져 그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몸소 가르쳐 주었다. 이 길만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요, 침체되고 성장이 둔화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길임을 그는 민족복음화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