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 대부분 크고 작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 관계의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그냥 알아서 될 거라고 생각하고 어색한 관계를 두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사람도 있고, 분노의 감정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색한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답은 분명하다. 베드로와의 어색한 관계를 먼저 회복하신 것처럼, 어색한 관계를 회복하는 게 맞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를 실천하는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도 도망간 베드로에게 감정이 없었을까?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다가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
어색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용서이다. 물론 용서 안에는 이해와 공감의 과정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 왜 용서가 필요할까?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게 아니다. 내 말이 논리적으로 맞기 때문에 용서받은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용서받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가 잘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 한다.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중요한 모습이 바로 ‘용서’하는 것이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바로 먼저 다가가는 용기이다. 아무리 이해하고 공감을 해도,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진심 어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또 귀찮다. 그런데 왜 용기를 내서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할까? 그 자체가 예수님이 보여준 모습대로 살겠다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죽어라 기도하고, 죽어라 예배하고, 성경을 보는 것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대로 사는 것이 더 제자가 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용기를 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모습이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안 그래도 해결되지 않던 갈등과 분열이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사람들 간의 거리가 멀어졌다. 세대간,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의료진과 정부의 갈등, 이념에 따른 갈등, 정파 간의 갈등 등 수많은 갈등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왜 그럴까? 내가 이겨야 이득을 얻고, 지면 다 뺏긴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갈등은 늘 있었다. 문제는 이런 갈등을 화해시키는 중간지대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특히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과 갈등의 한 축이 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힘들게 한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 안에서 먼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그렇게 실천하기로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좌로도, 우로도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제시하며 어색한 관계를 다시 제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로마제국을 살던 초대교회는 하루하루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비상 상황 속에 살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그 상황을 이겨냈다. 지금 우리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비상시국 속에 산다. 2024년을 끝맺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용서와 용기의 본이 필요할 때이다.
꿈의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