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해지는 영성
고린도후서 12:9~10
찬송: 407장
바울이 질병이 있어 세 번이나 고쳐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통한 바울의 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이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첫째, 내가 깨어지고 연약해질 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내가 약해질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너무나 연약한 자임을 깨달을 때 그에게 능력의 지팡이가 주어졌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 하시고 너무나도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능력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이란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데 필요한 능력입니다. 거짓 종과 참 종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기도는 내 뜻을 내려놓는 기도가 되어야 하고,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 고난의 길을 기꺼이 기뻐하고 걸어가는 성도가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것입니다.
오늘도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성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고난을 짊어지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내가 깨어지게 하시며 고난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직 주안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염려 대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빌립보서 4:6
찬송: 364장
‘염려’라는 말은 헬라어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에는 ‘질식시킨다’, ‘목을 졸라 죽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도끼와 장작을 비유하여 ‘염려’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장작이 도끼에 쪼개지듯이 사람의 마음은 염려에 장작처럼 쪼개져 버린다’ 염려는 그리스도인을 질식시키고, 염려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도끼로 장작을 쪼개듯이 만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가 염려하며 걱정스럽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에서 우리의 염려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염려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 30%는 이미 일어난 일, 22%는 아주 사소한 일,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염려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일은 단 4%라고 분석합니다. 우리 염려의 96%는 쓸데없는 염려인데, 우리는 불필요한 염려 때문에 우리 정신적 에너지 대부분을 낭비하고, 밤잠을 못 이룹니다.
성경적으로 염려의 반대말은 평안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염려의 반대말은 기도, 간구,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않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염려 대신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염려하는 대신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다윗의 계시의존적 믿음
사무엘하 2:1~17
찬송: 425장
사울의 시대는 그가 길보아 산에서 죽으면서 끝났지만 잔존 세력이 있어서 다윗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군대장관 아브넬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리됩니다(삼하 2~4장). 다윗으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첫째, 다윗은 계시의존적 신앙인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합니다. 다윗은 싸우러 가기 전 하나님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물었고 “올라가라”는 응답을 얻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리이까” 하며 주의 뜻을 구합니다.
둘째, 다윗은 올인(all-in)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헤브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져 놓았던 본거지 시글락을 버립니다.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대로 헤브론을 향해 나아갑니다. 뒤에 ‘플랜B’를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 명하신 ‘플랜A’만 믿고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계시의존적 올인의 믿음 아닐까요?
•오늘의 기도
기도와 말씀 묵상 가운데 주의 뜻을 묻고 따르는 계시의존적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내 생각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외치며 나아가게 하소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올린 인생이 되도록 은혜주소서.
서머나교회
요한계시록 2:8~11
찬송: 310장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영적 상태와 비전을 격려로 일깨워주십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와 교인들을 아신다는 점이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은 그 교회의 두 가지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 서머나 도시 자체는 부요한 도시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거절함으로 경제적 제재를 받았고, 그런 핍박으로 인해 궁핍을 겪었습니다. 그 사정을 주님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이 덧붙여집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이는 “그러나 너는 부요하니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교회의 현실적 어려움과 궁핍을 인정하셨지만 곧이어 그 본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판단과 인식과 그가 주시는 부요의식을 받아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주님이 아시는 또 한가지 사실은 그들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에게서 비방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머나 교회 같은 순진한 교회가 같은 유대인들에게서 고통을 겪었는데 주님은 이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도 논리의 반전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 신앙생활에도 담력과 맷집이 필요합니다. 또 죽도록 충성하는 가운데 신앙 승리의 비밀이 숨어 있는 위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충성하는 가운데 예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영적 전쟁에 승리하며 충성하게 하소서.
죽는 것도 유익하니
빌립보서 1:20~21
찬송: 523장
오늘 본문 20~21절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구원은 바울만 받은 것이 아니고, 은혜는 바울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같은 구원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뿐 아니라, 오늘도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며, 호사를 누리는 데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값을 헐값으로 만드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고 고백하며,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증인으로 한 영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어울리는 사람
사무엘상 25:23~25
찬송: 91장
오늘 본문에 나발이라 이름한 자와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등장합니다. 나발의 이름의 뜻은 ‘미련한 자’이고,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대로 나발은 심히 부하였지만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고,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소유의 일부를 구했을 때, 이를 거절한 일로 인하여 격분한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갈 때에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이 지혜로운 말로 다윗을 설득하여 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둘을 보면서 참으로 그 이름에 적당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러 이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인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 주신 이름에 잘 어울리려면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목사, 교사, 집사, 장로 등 여러 이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에겐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름에 우리는 어울리는 내면과 행함을 가졌는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이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과 잘 어울리는 개인과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그리스도의 이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