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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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4.07.2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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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66) 하나님의 이름(신약)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신약도 역시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엘로힘’에 해당하는 말은 ‘데오스’(θεος)인데, 신약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름으로 신약에서만 1,000여회 이상 사용되고 있다. ‘엘로힘’과 같이, ‘데오스’는 엄밀하게 말했을 때 본질적인 신성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편의대로 이방의 신들에게도 사용된다.

‘신학’이란 말의 사용과 관련하여 프랜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신학,’ ‘하나님,’ 그리고 ‘교회’ 등의 용어를 이교의 용어를 차용하여 사용한 대표적인 경우로 언급하고 있다. 튜레틴은 비록 이방인들이 ‘신학’이라는 용어를 남용하여 그들의 그릇된 체계를 가리키는데 사용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하고 그릇된 의미를 부여한 그 용어를 ‘우리의 참되고 구원적인 가르침’에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신학’이라는 말의 사용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 자체도 이방인 중에서 거짓되고 가상적인 신을 가리켰던 말이었으며 ‘교회’를 가리키는 말(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도 세속적인 집회에 적용되던 용어였는데 이런 용어들을 성경에서 참되신 하나님과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키기 위해 더 온당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의 학교에서 사용되던 ‘신학’이라는 용어도 거룩한 용도로 전환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집트의 물품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거룩한 목적에 이바지한 것과 마찬가지다.”(Turretin, 『변증신학 강요』, 44)

벌코프는 요한계시록의 여러 구절들에서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그 배경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1:4),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17),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2:8),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21: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과 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묘사를 통해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Berkhof, 『조직신학 상』, 242)

신약 성경이 파테르(Pater,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새 이름을 소개했다고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이방 종교들 속에서도 신성에 관하여 사용된다. 그것은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지시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63장 16절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매우 저열한 가운데 있다.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들과 같은 후손을 둔 것을 부끄러워하는 정도의 처지인 것이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 부여잡는 한가닥 소망의 끈과도 같은 부르짖음이 바로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사야 64장 8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주권에 호소하며 자신들이 진흙에 불과하며 하나님께서 토기장이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구약 성경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엄위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 아버지로 소개하신 것은 예수님만의 특이한 용법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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