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과 신문 제작으로 민중 계몽, ‘협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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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신문 제작으로 민중 계몽, ‘협성회’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7.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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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5) // 학생운동단체 시작한 ‘배재학당’(하)

개화기의 혼란 속에 조선은 일본에 종속됐다. 이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부를 통한 실력양성은 당연하고 3.1운동이나 동맹휴학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어리다고 무시할 수 없는 애국심을 보였다. 
학생들은 학생단체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했던 ‘협성회’가 학생단체의 시작을 잘 끊은 덕에 학교들마다 우후죽순처럼 학생단체가 생겨났다. 
협성회는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하던 서재필이 학생들과 함께 만든 학생단체다. 서재필은 받기만 하는 강의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이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장차 배재학당 출신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실행할 인재라고 생각해 토론회 개최를 학생들에게 권유했다. 최초에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밝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토론에 익숙해졌다. 학생들이 토론 문화에 적응한 1896년 11월 30일 정식으로 협성회는 조직됐다. 놀라운 점은 배재학당에 있는 인쇄기를 활용해 <협성회 회보>라는 신문까지 발행했다는 점이다. 
<협성회 회보>의 창간호에서 협성회는 여러 설립 목적을 들었지만, 특히 애국과 계몽을 강조했다. 협성회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중심이 돼 만들었지만, 민중 계몽이 설립 목적이었기 때문에, 배재학당 학생이 아니더라도 가입이 가능했다. 13명으로 시작한 협성회는 조직 1주년을 맞았을 때 회원이 200명이었으며, 또 1년 후인 1898년에는 300명까지 증가했다.
토론회는 매주 토요일 진행됐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타인의 의견을 듣는 민주적인 토론회는 당시 조선사회에 낯선 것이었지만, 협성회 회원들은 빠르게 적응했다. 이들은 정치·경제·사회 등 조선사회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특히 사회분야를 주제로 한 토론이 많았다. 초창기에는 ‘국한문 병용’, ‘학생 복장의 착용’ 등 교육관련 주제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 문제로 확대됐다. 시간이 흐르며 학생들은 종로4가 등에서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협성회가 자신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만들었던 <협성회 회보>는 순국문체로 만들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최초의 민간인 신문이었다. 1면에는 논설, 2면에는 국내 정세, 3면에는 국외 정세, 4면에는 학생회 내용을 담았다. 특히나 자주적인 독립을 논조로 했으며 교육과 계몽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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