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혀둔 위기는 독… 디브리핑으로 위기 직면하고 상황 나눠야
분명 뼈를 묻을 각오로 선교지로 향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마주한 현실은 굳은 각오만으로 웃으며 버텨내긴 버거웠다. 살인, 납치, 무장 강도, 성추행… 한국에선 뉴스로나마 접했던 먼 나라 이야기들이 갑자기 눈앞의 일상이 됐다.
희생정신은 귀하나 불필요한 위기는 막아야 한다. 아무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파송받은 선교사라 해도 불구덩이에 던져두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 선교지에서 겪는 위험은 선교사라면 모두 감내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위기관리재단은 지난 23일 ‘선교지의 위기와 멤버케어’를 주제로 위기관리 세미나를 열고 선교지에서 위기를 겪었을 때 어떤 대응이 필요한지 논의했다. 강사로는 KWMA 산하 한국선교상담센터(Memver Care Center, MCC) 국제대표이자 기독 역동상담 치료 전문가인 이경애 선교사(OMF)가 나섰다.
확대된 위기관리 시스템
모라비안 교도들은 선교지로 가기 전 자신의 관을 짰다. 치수를 재고 미리 관을 짠 다음 그 안에 필요한 물품을 넣어 관을 지고 선교지로 향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배에 몸을 실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선장이 아프리카로 향하는 선교사들을 보고 “거기 가 봐야 당신들은 모두 죽을 거야”라며 비웃자, 한 선교사가 “선장님, 우리는 떠나기 이전에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듯 초기의 선교는 철저히 선교사 개인의 확고한 영성을 바탕으로 했다. 선교지에서 겪을 위기, 그 중에서도 상정할 수 있는 가장 큰 위기인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각오로 떠났다. 지금보다 더 큰 위험이 선교지에 도사리고 있었고 파송단체나 교회 역시 위기에 대응할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선교사 멤버 케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경애 선교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야 멤버 케어의 범위가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데이브 폴락과 켈리 오도넬이라는 선교학자가 멤버 케어의 실천적 모델을 만들었다. 몇 겹의 원으로 둘러싸인 모델의 가장 중심에는 주님의 케어가 존재한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케어(Self-Care), 다음은 파송단체에서의 케어(Sender-Care), 전문가 케어(Specialist-Care), 네트워크 케어(Network-Care)로 범위를 넓혀간다”면서 “초기엔 오로지 주님의 케어와 선교사 각자의 대응에만 의존했다면 점점 파송단체와 전문가, 시스템에 기반한 네트워크로도 범위가 확대돼 왔다”고 전했다.
파송과 동시에 위기는 시작된다
대부분 선교사의 위기는 선교지에 가야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선교사의 위기는 선교지에 당도했을 때 맞이하는 상황적 위기가 있는가 하면 선교사가 그동안 쌓아온 감정과 경험에서 비롯된 점진적 위기도 있다. 어릴 때 겪은 충격적인 사건이나 치유되지 않고 누적된 상처가 선교지에 가서 위기로 발현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상 선교사는 선교사로 부름 받은 그 순간부터 이미 위기 속에 있는 셈이다.
이경애 선교사는 “상황적 위기가 지진, 풍토병, 안전사고, 강력범죄, 추방 등이라면 점진적 위기는 외로움과 좌절, 우울과 불안, 거절감, 비교의식 같은 것들이 있다. 상황적 위기는 명백히 겉으로 드러나 얼른 해결하려고 하는 반면 점진적 위기는 혼자서 끙끙대다 다뤄지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점진적 위기는 상황적 위기보다 더 치명적이다. 특히 외적 위기와 내적 취약성이 중첩되면 위기가 증폭된다”고 경고했다.
내면의 취약성은 흔히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역사에 기록될만한 대형 참사도 트라우마로 남지만 어릴 적 집에 가도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상처도 트라우마가 된다. ‘나쁜 경험’으로 분류되는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잊혀지는 법이지만 보다 문제가 되는 쪽은 결핍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다. 힘든 자신을 극복하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선교사로 헌신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트라우마가 저절로 사라져주지는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디브리핑(Debriefing)이다.
“‘믿음’으로 덮어서는 안 돼”
위기 사건이 발생한 후 위기를 겪은 이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깊이 있게 위기 사건을 정리하도록 하는 것. 일반인들에겐 낯선 단어일 디브리핑에 대한 정의다. 원래 위험 지역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을 선교계에서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디브리핑은 목적과 필요에 따라 사역 디브리핑, 개인 디브리핑, 위기 디브리핑, 피어 디브리핑, 그룹 디브리핑으로 나뉜다. 특히 위기 후에 시급하게 이뤄져야 할 것은 위기 디브리핑이다. 위기 디브리핑은 위기 전문가에 의해 시행되는 마음의 타박상에 대한 응급처치라 할 수 있다. 충격에서 신속하게 벗어나도록 돕고 후유증(PTSD)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된다. 가장 적절한 시간은 위기가 발생한 후 24시간에서 72시간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다.
다만 디브리핑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중요하다. 사건이 크고 작든 위기가 유쾌할 리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잘한 것을 나누고 싶어 하지 위기와 힘든 경험을 나누는 걸 즐기지 않는다. 이는 선교지에서 겪은 위기가 본인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어서다.
이 선교사는 “한국 선교계는 위기와 약점을 나누고 보고하지 않는 분위기다. 사건이 터졌을 때의 반응을, 위기에 대해 나누고 향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고민하는가 혹은 쉬쉬하고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는가로 구분하면 서구 선교계는 전자, 한국 선교계는 후자에 가깝다”면서 “위기에 대해 나눴을 때 아무런 판단이나 정죄 없이 선교지에서의 경험이 온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 굳이 좋지 않은 기억을 한 번 더 되새겨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이들도 있을 터. 위기를 겪은 선교사 본인도 ‘한참 지났고 다 극복한 것 같은데 얘길 해야 하나, 말한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신앙인이다보니 ‘기도로 해결하면 된다’고 넘기기도 한다.
이 선교사는 “위기가 발생하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하지만 모든 트라우마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변하진 않는다. PTSD로 악화되는 이유는 오히려 위기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우리의 뇌는 충격적이었던 사건에 대해 다시 이성적으로 짚어보고 이해할 때 다른 기억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잊혀진다.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졌는지 슬픔과 우울과 상실감, 의구심과 공포, 분노가 솟아오를 때 무리해서 떨쳐내려 하기보다 그런 감정이 정상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위기를 겪은 선교사에 대한 파송 단체의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충격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선교사에게 돌아오는 대답이 “원래 위험한 곳인 줄 알고 갔지 않느냐”는 식이면 곤란하다. 이런 반응이 계속되면 선교사가 위기를 겪더라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위기를 겪은 선교사에게 적절한 케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귀하디 귀한 한 사람의 선교 자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경애 선교사는 늦어도 좋으니 위기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디브리핑을 받고 적절한 조치를 받을 것을 선교사와 파송단체 모두에게 조언했다.
그는 “위기를 겪었을 때의 반응은 보통 과잉반응이나 평가절하로 나뉜다. 그런데 선교사가 위기를 겪으면 믿음의 문제로 덮어버리며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충격을 받았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이라며 “아무도, 자기 자신도 위기의 부정적 영향과 심각성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다. 선교사는 반드시 위기를 경험했다면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아야 하고 파송단체 역시 선교사가 사건과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