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상가 교회지만 사역은 풍성…모든 재정은 지역사회로
교회가 곧 사회, 목회자의 시선은 ‘내 교회’ 울타리 넘어서야
이 세상 대부분의 교회가 자립교회가 되길 꿈꾼다. 번듯한 예배당에 안정된 재정, 이를 뒷받침할 많은 수의 성도들이 교회를 채우길 바란다. 하지만 여기 시대를 역행하는 교회가 있다. 평생 미자립교회로 남아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바라보고 가겠다고 선언한 오빌교회(담임:오만종 목사)다.
오빌교회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다. 비록 예배당은 상가건물 지하 1층에 있어도 펼치는 사역의 면면은 속이 꽉 차있다. 낮은 곳을 향하는 교회 오빌교회를 개척하고 지역사회와 주민을 위한 목회를 펼치고 있는 오만종 목사를 지난달 28일 만났다.
광야를 지나 개척까지
무려 6살 때부터 목사를 꿈꿨던 그였다. 물론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아이가 거창한 목회 비전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담임 전도사님이 심방 오실 때마다 풍성하게 차려지는 식탁에 눈길이 갔다. 어린 마음에 나도 목사가 되면 저렇게 대접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린아이다운 순진무구한 이유였지만 의외로 목사라는 꿈을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집사 직분을 맡고 있던 부모님도 반대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레 별명이 목사라고 불렸다. 집에 TV도 없던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갔던 부흥회가 그렇게 재밌었고 교회가 좋았다.
당연히 가야할 길을 가는 듯 신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를 마치고 개척을 해야 할 때쯤 전환점을 맞았다. 목회자를 대상으로 며칠 동안 계속되는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날 같이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저는 십계명을 다 어긴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생긴 마음이 은혜이고 구원의 확신이고 성령충만이라고 여겼죠. 그러니 사람과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6개월 정도를 성경책 하나 끼고 돈키호테처럼 미친 듯이 다녔어요. 순례자처럼 거리에서 외쳤고 청소년들을 전도한답시고 갔다가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가기도 했죠. 평소에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제 성격이 정반대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인줄 알았던 ‘돈키호테’의 삶은 사실 정상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로 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도 했었고 기도원에서 1달간 지내기도 했다. 1년간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목회자의 길까지 선택했던 신앙에 회의가 생겼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달렸는데 왜 인생 바닥에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처음으로 신은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성경책을 불태우고 찢어도 봤다. 철저한 광야의 시간이었다.
“1년 정도 치료를 받으니 약물의 효과로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제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저를 위해서라도 계셔야 합니다’라고 고백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불경건한 기도 같은데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죠. 내일도 불명확하고 죽음 이후도 모르겠고, 희망이 없는데 하나님조차 안계시면 안 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때의 절박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교회 공간을 내어주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지 고민했다. 스스로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고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서 인문학 서적을 뒤적거렸다. 하나님에 대해 알겠다고 신학을 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인간, 그리고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기도만으로 정신의 문제가 낫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는 전인적 돌봄이 부족했어요. 교회 안에서도 사회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지역사회를 향하는 교회를 꿈꾸며 2012년 5월, 오빌교회가 시작됐다. 먼저 맘 편히 쉴 곳 없는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교회에 책을 구비하고 작은 도서관을 꾸렸다. 하지만 기대만큼 주민들이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의미를 갖고 시작했지만 주민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서관이 교회라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이상 종교시설이라는 한계가 존재하고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느껴질 수 있었죠. 오랜 기도 끝에 교회에 있는 강대상과 성구를 다 정리하고 표면적인 종교성을 없앴습니다. 교회 간판을 내리고 도서관 간판을 올린 뒤 교회 이름은 아주 작게 표시했어요. 이전까진 교회 안에 도서관이 존재했다면, 이젠 도서관 공간을 교회가 빌려 쓰는 형태로 바뀐 거죠.”
모습을 바꾸자 변화는 확연히 드러났다. 구청에서 청년 사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인력이 생기니 도서관 문을 늘 열어놓을 수 있었다. 서울시 마을 공동체 지원 사업에도 선정됐다. 자연스레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훨씬 많아졌다.
“지금에야 하나님 뜻에 순종하니 역시 잘 됐구나 하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내일이 보이지 않는 결정이었습니다. 교회 간판을 내리고 교회 공간의 주체를 내어준다는 것이 교회로서는 목숨을 건 도전이었죠.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샘플’은 원래 작습니다
오빌교회의 결단은 교회 공간의 주인을 주민들에게 내어준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역 사회의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 모든 재정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상가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미자립교회지만 교회 건물을 위해 돈을 모으지 않았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곧 교회의 자립이라 믿고 재정은 오직 어려운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쓰는 미자립교회로 평생 남기로 했다.
오빌교회의 사역은 교인 수십 명의 지하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마을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페를 운영하며 노인과 장애인을 고용해 소외계층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했다. 오만종 목사는 라이프호프 자살예방센터 강동지회장을 맡으며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거름삼아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이웃과 사회를 섬기고 사회적 목회를 펼치는 일은 재정이 넉넉한 대형교회의 몫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교회가 이런 사역을 해낼 수 있었을까. 이유를 묻자 오 목사는 역설적인 대답을 내놨다. 오히려 작은 교회였기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기존 교회들에겐 힘든 결단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대형교회라면 더 힘들겠죠. 하지만 작은 교회라면 보다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이것이 바로 작은 교회의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의 소위 ‘성공신화’만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눈을 돌렸으면 좋겠어요.”
물론 작은 교회였기에 가능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빌교회의 사회적 목회는 ‘교회가 곧 사회고, 사회가 곧 교회’라는 오만종 목사의 목회철학이 뒷받침됐기에 이뤄졌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도 우리 이웃 중 한 명이고 교회 역시 사회의 일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교회도 세상 안에 있는데 마치 세상이 아니고 동떨어진 존재인 것처럼 인식해왔어요. 이런 이분법적인 신학은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서 한계에 부딪힐 거라고 봅니다. 교회가 사회로 눈을 돌리지 못했던 것은 우리 교회만의 평화, 내 성전 안의 신앙만을 바라봤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해야만 해요.”
‘샘플’은 원래 작다. 백화점에서, 혹은 마트에서 제품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는 샘플은 어느 하나 큰 것이 없다. 오만종 목사가 꿈꾸는 교회는 샘플이 되는 교회다. 오빌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작은 교회들도 사회로 눈길을 돌리길 소망한다.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엔 규모가 너무 작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샘플은 원래 작기 때문이다.
“기도를 눈감고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눈을 뜨고 움직이며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고 몸이 가고 발걸음이 가는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는 한 달에 5만 원씩 사랑의 쌀을 나누는 것으로 사회적 목회를 시작했어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거리에서 노방전도하는 용기, 그 진심어린 용기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