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우광복과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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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우광복과 백석
  • 이규환 목사
  • 승인 2020.08.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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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환 목사 / 목양교회 담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한국명 우리암. 1883~1962년)는 1906년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왔고 이듬해 그곳에서 첫아들 조지 윌리엄스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는 훗날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남편의 한국 이름과 같이 아들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바꾸었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샤프 선교사의 뒤를 이어 공주로 와서 1906년에 영명학교를 세웠다. 영명학교 출신으로는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이 있다. 우리암 선교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35년간 공주를 중심으로 하여 교육과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추방되었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한국이 광복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는 한국에 와서 미군정청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한국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독립운동가이며 농촌운동가인 배민수 목사가 우리암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암의 아들 우광복도 영명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의학 공부를 했다. 선교사 자녀로 복음에 대한 열망과 소명을 갖고 자기가 태어난 한국으로 와서 사역을 했다. 1945년 9월 미군 1만여 명이 남한에 있을 때에 책임자가 하지 사령관이었다. 우광복은 하지 사령관의 통역관 겸 특별보좌역을 맡았다. 의학박사였던 우광복은 해군 군의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특별히 위생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제물포 집을 찾았고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세 명의 한국인과 미 실무장교가 언어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보고 통역을 했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에 필요한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우광복은 자기 부모와 함께 50명을 추천해 주었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기독교 교육이 나라의 인재를 양성했음을 증명한다. 우광복이 추천한 인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지도자들이 되었고, 제헌 국회를 열 수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제헌 국회를 시작하면서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시켰다. 대한민국 국회가 기도로 출범한 것이다. 우광복이 추천한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미동맹을 체결하는 일에게도 크게 기여했다. 

우광복은 한국에서 사역을 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94년 87세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1995년 충남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 뒷동산에 안장이 되었다. 그 이유는 자기 여동생 올리브(1909~1917년)가 그 땅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여동생이 어린 시절에 풍토병에 걸려 일찍 죽은 것을 평생 잊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고향에 안식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어렵고 힘든 때에 한국에 와서 남편을 잃고, 자녀를 잃고 또 선교사 자신들의 목숨을 잃으면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교육과 선교와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 그 교육과 섬김과 헌신을 우리가 해야 한다. 

일찍이 교육과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백석학원을 설립한 장종현 박사의 뜻이 우광복 박사의 나라 사랑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 백석 교단과 백석 학원을 통한 기독교 교육과 선교가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좋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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