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벨직신앙고백과 도르트신경과 함께 개혁교회의 3대 교리표준문서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지 450주년이 되는 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동안 개혁교회 안에서 끊임없는 설교와 교육으로 신앙을 든든하게 세워왔다. 최근 한국장로교신학회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한국장로교회’를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방향성을 제시한 두 발제자의 주장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 교회에서 성찬은 지나치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찬식의 분위기를보면 잘 알 수 있다. 성찬식은 잔치가 아니라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물론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임을 가리킨다. 주님도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성찬을 제정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임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이다. 성찬식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주님의 고통인아 주님과의 이별을 기억하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요리문답의 이해와 얼마나 다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찬의 본질은 ‘영적인’ 그러나 실제적인 ‘식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찬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 있고 이것을 향하도록 가리키지만 성찬, 그 자체는 제사가 아니며 오히려 십자가의 제사로 인하여 우리가 누리는 영적인 잔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성찬을 제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희생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감사의 제사이다.
요리문답은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는 두 감각기관인 눈과 입에 연결돼 있다. 첫째, 우리는 성찬식에서 눈으로 주님의 떡이 ‘나에게’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본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몸이 ‘나를 위해’ 찢기셨고, 그의 피가 ‘나를 위해’ 쏟아지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성찬에서는 ‘나에게 주어짐’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찬의 본질이 ‘하나님께 드려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어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리문답은 성찬을 정의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성찬의 본질을 로마 가톨릭처럼 제사로 이해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둘째, 우리는 성찬에서 눈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나를 위해서 찢기로 흘렸다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배부르게 하시고, 기쁘게 하시는 것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체험하게 된다. 성찬은 이렇게 ‘봄’과 ‘받아먹음’으로 구성된다.
요리문답에 따르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하는 방식은 성령의 역사이다.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는 개혁파 성찬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가 참여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다.
그렇다면 성례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통해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장로교회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성례의 본질에 대한 개혁파적 전통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례가 표와 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을 뿐 아니라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장로교회 성례는 지나치게 상징설에 치우쳐 있다. 그 결과 성례는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예식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인으로서의 성례를 균형 있게 강조해야 성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나친 설교 중심적 예배는 지양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는 지나치게 강조되지만 성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그 결과 설교도 같이 무너져가고 있다. 오늘날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복음이 빠지거나 약화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례가 설교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와 같은 불균형은 성례의 강화를 통해 시정돼야 한다. 우리는 참 교회의 표지가 순수한 말씀의 설교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따른 성례의 시행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성례를 매주 혹은 자주 시행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성례에 대해 얼마나 미흡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성례를 시행하는 횟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일 년에 두 세 차례 몰아서 시행하는 성례가 성도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에 얼마나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요리문답의 내용을 잘 이해하면 성례를 매주 혹은 자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성례의 실시를 통해 은혜를 베푸신다. 성례에 대한 백 번의 연구 발표보다 한 번의 성례 실시가 교회를 튼튼하게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