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람 윌리엄 시무어
상태바
성령의 사람 윌리엄 시무어
  • 운영자
  • 승인 2013.07.09 2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철재 목사 / 한국오순절교회협의회 명예회장

1906년 4월 25일부터 3년간 하루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일어난 아주사 성령폭발의 진원지인 시무어 목사의 기도처는 성가대도 없고, 헌금도 걷지 않았고, 모임의 광고도 없었고, 교회나 교단의 배후조직도 없었다. LA의 아주사거리 312번지 낡은 2층짜리 흰색건물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시무어는 1870년 5월 2일 루이지애나 주의 흑인 농장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남북전쟁을 전후한 K.K.K.의 혹독한 인종차별 속에서 웨슬리언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오순절신앙 지도자다.

첫째, 시무어는 성령 안에서의 방언을 인종간의 화해와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남북전쟁을 전후한 미국의 가장 시급한 사회적 분열인 인종문제에 대한 성령의 치유하심으로 확신했다. 이는 백인 지도자들이 전혀 볼 수 없었던 역사적 발견이다. 왜냐하면 시무어의 성령운동은 백인 주도의 선교사역을 다인종 선교시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서 폭발한 오순절운동은 당시 로마제국의 인종의 벽, 신분의 벽, 성별의 벽을 허물었었던 것과 같이 20세기 초의 늦은 비 성령의 역사도 농장주와 노예의 벽, 인종의 벽, 신분, 성별의 벽을 헌 것이다. 인종의 벽을 헌것은 방언의 기적보다 더 큰 업적이었다.

두 번째, 시무어는 모든 이들을 동등하게 대하였고 그들 모두를 예비지도자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가 인종문제의 해결이었다면, 두 번째는 성별과 계층 간의 벽을 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당시 교회사역의 뒷자리에 머물러있던 여성인력을 선교자원으로 만든 것이다. 성령의 가장 달콤한 사역은 ‘사랑스러운 화목이다’라는 시무어의 표현에서도 보이듯이 이 성령의 역사는 여성 지도자들이 선교와 교회지도자로 배출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여성들이 성경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기름을 붓고 기도하여 병을 고쳐주고, 자진하여 집을 청소해 주고,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보아주었다. 그 결과 줄리아 허치슨, 닐리 테리, 제니 무어, 아그네스 오즈만, 프로렌스 크로피드 등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나왔다. “예수 안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모두가 하나다”라고 시무어는 선언했다.

세 번째, 사랑의 강조다. 오순절 권능의 요약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았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표준으로 삼았다. 시무어는 사랑을 ‘예수님의 표준’, ‘성경의 표준’, 또는 ‘아주사의 표준’이라고 불렀다. 성령세례의 표적이 방언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이 성령임재의 핵심적인 실체라고 보았다. 특히 성령 안에서의 사랑을 개인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보았다. 성령세례의 진정한 증거는 거룩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종, 신분, 성별을 초월한 사랑의 공동체의 형성임을 강조했다. 훗날 오순절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사랑이 아닌 방언을 오순절교회의 특징으로 규정한 것은 매우 유감된 편견이라 하겠다.

네 번째, 시무어 자신의 성화다. 감리교에 뿌리를 둔 그의 신앙은 웨슬레의 기독인의 온전을 몸소 경험하고 실천한 것이다. 그의 지도력에는 분별력이 있었고 온화했고 어떤 장애물도 없는 평안이 있었다. 시무어 자신이 기독인의 온전한 사랑을 삶으로 증거해 보인 것이다. 찰스 패럼같이 방언을 강조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으나 요엘 2장 23절에서 예언하신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시무어 목사의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오순절교회의 태동이라 하겠다.

성령은 예수가 누구(who)시며 예수가 무엇(what)을 하셨는지를 알게 하시고(to know), 되게 하시고(to be), 살게(to do)하시는 분이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