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 문화칼럼] 부활의 절기에 교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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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문화칼럼] 부활의 절기에 교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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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2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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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8)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부활 후 두 번째 날. 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긴다. 과연 부활의 주님 예수께서 바라는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성경은 사도행전을 통해 분명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셨다(행 2: 43-47).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나고 역사가 바뀌어도 변해서는 안 될 교회의 원형인데, 죄악이 관영한 사회, 죄악의 물을 아직 벗지 못한 인간들이 교회에 들어와 거룩함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학 작품들이 이 문제를 이미 예견한 듯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타락한 주교를 그려준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한 마을에서 사랑을 베푸는데, 주교가 예수님을 조용히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는 “예수여, 내가 지금까지 이 교구를 잘 맡아 다르시고 있는데, 당신이 오히려 방해하는구려. 그러니 내 구역에서 떠나주시오”라고 명령한다. 19세기 제정 러시아 때 일이지만 그 상황은 어쩌면 지금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닌지. 누가 예수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권세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기독교의 권태를 다룬다. 고도라는 이가 누군지도 모른채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저 기다림이 생활의 목적이 되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권태에 빠진 사람들. 그들에게 삶과 신앙은 그저 일상의 무료함을 탈피하기 위한 게임으로 치부되고 만다.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권태에 빠진 기독교인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만연해있는 우리 자신들은 아닐까. 우리들은 진정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가 남겨주신 고난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리한 시선 역시 이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희랍인 조르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에서 위선 가득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경고한다. 작가의 감정은 거의 구토(嘔吐) 수준이다. 주께서 “토하여 내치리라” 절규하셨던 그 정도라 할까. 우리 자신을 위시한 현대 기독교인들, 그들이 출입하는 교회는 과연 이 위선의 덫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기독교 3대 절기 중 하나인 부활절, 이 절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는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들이 듣겠나이다”라고 회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장본인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활의 절기에 하나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시는 교회의 원형을 복음 가운데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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