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개혁주의 미학의 씨앗,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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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개혁주의 미학의 씨앗,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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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2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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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그늘에 생명의 빛을, 카이퍼의 개혁주의 미학 (17) - 안용준 목사(목원대 겸임교수)

현대 개혁주의 미학의 씨앗,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1870년대 네덜란드의 고등교육은 세상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은 이성주의자, 인본주의자, 급진주의자에 의해 하나씩 독점되어 갔다. 그들은 대학의 높은 직책을 차지했다. 그들의 인생철학이 곧 진리요 교육의 내용이었다. 개혁주의 학자와 성도들은 명문 레이든 대학과 흐로닝언 대학에 기대를 했으나 그마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후의 보루였던 신학교조차도 진리의 좌표로서의 역할에 상처를 받아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가 되었다. 성직자, 교수 등 많은 졸업생들이 성경이 아닌 개인의 시각에 따라 불신앙의 원칙을 전문 영역에 퍼뜨리고 있었다.

그 당시 카이퍼는 대다수 동료들이 낙심 가운데 실의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 이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는 크리스천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할 때 국가와 타인의 유익을 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결국 성도를 격려하며 신앙을 타협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며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할 개혁 대학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이런 학교를 설립할 것인가?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국회의원들이 발흥을 꾀하는 시점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퍼의 반대자들은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맹렬한 기세로 대들었다. 그럴수록 카이퍼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다

카이퍼는 개혁신학과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대학이야말로 국가를 자유롭게 하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들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이러한 모토를 가지고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는 1880년 12월에 5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탄생했다.

놀랍게도 존 칼빈(John Calvin)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주의 미학도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카이퍼는 백과사전적 거인이었다. 그는 조직신학과 히브리어, 설교학, 문학뿐만이 아니라 미학에 관해서도 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회화, 건축, 조각, 시와 음악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 학생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초창기 빌딩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는 미학과 예술론의 영역에 카이퍼 만이 활동한 게 아니었다. 믿음의 인재들이 교수로 영입되었으며 배출되었다. 20세기에 활동한 헤르만 도여베르트(Hermann Dooyeweerd: 1894-1977)와 디르크 볼렌호벤(Dirk Hendrik Theodoor Vollenhoven: 1892-1978),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 1922-1977) 등이 이 학교의 교수였다. 볼렌호벤은 현대 개혁주의 미학의 가장 최근의 성취를 보여주는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 1930- )의 지도교수가 되었다.

시어벨트는 훗날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의 교수가 되어 개혁주의 미학의 거장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미술사학자로 이름을 날린 로크마커는 도여베르트 철학을 공부하면서 서양철학의 뿌리에 기독교적 결단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저술과 강의가 유럽과 미국에 알려지면서 개혁주의 미학이란 분야가 새로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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