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작가의 ‘천일의 약속’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젊은 여인 서연(수애 분)과 그녀를 희생으로 보듬는 남자 지형(김래원 분)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다. 또한 그 두 사람을 곁에서 조건 없이 사랑하는 가족 이야기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려놓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포기’와 ‘희생’을 의미하는 이 책의 제목은 어느새 기독교계를 넘어 일반 사회에서까지 흔히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내려놓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단어에서 어떤 ‘수상함’을 느꼈다. 이는 내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개념과 ‘내려놓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충돌 때문이었다.
그 수상함은 행여나 ‘내려놓음’이 더 좋은 것을 ‘올려놓으려는’ 일종의 수지맞는 투자를 위한 전 단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 기독교 구석구석에 너무도 만연한 세속주의의 본질을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최고의 수익을 내기 위한 신앙 또는 거룩함의 탈을 쓴 갖가지 투자기법들’이라고 말하겠다. 이 투자가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십일조를 내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열 배, 백배로 더 채워주실 것이라는 투자의 개념이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새벽에 기도해야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신다는 생각, 만 시간 기도를 채우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생각 등등 더 큰 수익(축복)을 목표로 한 투자의 개념이 들어 있지 않은 신앙생활이 우리 속에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결론은 자명하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투자는 상극이다. 사랑하면 투자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칠 수 없다. 투자자는 사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다니며 돈을 벌려는 투자 목적으로 서연을 선택했을까? 지형의 어머니가 나중에 자식에게 인정받기 위한 투자 개념으로 자식을 받아주었을까?
기독교를 ‘제대로’ 믿는 것이 왜 힘들고 어려운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힘들다. 기독교의 믿음은 구원과 관련한 몇몇 문장들을 그냥 두 눈 딱 감고 “믿습니다!” 하고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다. 나는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
“예수 믿는 거 참 쉬워요.”
사랑이 쉬운가? 다시 말하지만 결론은 사랑이다. 사랑한다면 그 마음속에는 애초에 ‘내려놓으니’, ‘더 내려놓으니’, ‘올려놓으니’ 하는 생각 자체가, 투자의 개념 자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국 사랑이 없기에 우리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각종 그럴 듯한 용어들을 사용해 사람들로 하여금 투자하도록 한다. 사실상 투자지만 투자가 아닌 것처럼 그럴싸한 거룩한 용어들을 갖다 붙이며 발버둥 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내가 포기하고 희생하며 내려놓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약속하는 투자다.
그렇다. 우리는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다시 부딪힌다. 보이는 인간도 사랑 못 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힘든 문제다. 힘든 만큼 그냥 이 문제만은 피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만은 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질문을 나의 온 존재로 부딪쳐야 한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기에 평생 교회를 다니며 내려놓으려 발버둥치는 그런 비참하고 피곤한 삶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더 근사한 것을 짊어지기 위해 조금 후진 것에 눈물 좀 흘리면서 잠시 내려놓는 그런 얄팍한 술수야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의 불꽃같은 눈에 다 보일 테니까 말이다.
옥성호(국제제자훈련원 출판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