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용어 바로 쓰기(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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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용어 바로 쓰기(130)
  • 승인 2004.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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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형벌’은 ‘십자가 고난’으로


목회자들의 설교나 교인들의 기도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사건을 인용할 때 “주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몸소 받으심으로 우리는 자유함과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여기에서 ‘십자가 형벌’이라는 말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무죄성과 거룩성과 의로우심에 있어 완전한 신적 충분성을 가지고 계심으로써 종교적 관점에서 결함이 없고(행 7:52) 윤리와 도덕적 관점에서 흠과 티가 없으며(벧전 1:19) 공생애 기간 중 유대적 전통과 율례와 정치적 관계에서 또는 문화적 질서에서도 저촉됨이나 결함이 없으셨던 분이다. 그 증거로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이 심문을 할 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잘못을 찾지 못했으며(마 27:23~24), 또한 빌라도 총독이 재판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 27:19)라고 한 점으로도 예수님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인 예수님에게는 형벌에 상응한 죄과(罪過)가 없었기 때문에 징벌 차원의 수난(受難)은 아닌 것이다. 비록 인간의 멸망 받을 죄가 주님께 전가되어 겪은 일이라고 해도 죄에 대한 응분의 징벌은 아니며 의인으로서 죄인의 처지를 취한 것일 뿐 범죄한 죄인의 신분은 아니었다(고후 5:21).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에 의존되고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그 경륜에 자원적 순종이며 인류에게는 구원을 위한 포용적 대속의 희생이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신적 경륜을 떠나서 법적, 정치적, 윤리적 또는 주님 자신에게 있어서 죽으셔야 할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형벌이나 죄에 응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 53:5). 이렇게 주님은 죽음의 동기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다만 십자가는 형틀이고 골고다는 형장이며 그의 죽음은 명분상 사형같으나 그것은 필연적인 형벌의 근거와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죄로 멸망 받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고 형벌같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형벌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셨다면 그리스도의 무죄성에 문제가 있게 되며 의인으로서 죄인 인간을 대신할 자격에 문제가 있게 되고 중보자로서 신적 의로움의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 그런고로 십자가는 주님에게 있어서는 대속적 고난의 무거운 짐인 것이므로 설교자와 기도자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형벌적 개념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고난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표현해야 하며, 죽음도 감각적인 내용은 고통이요 고난인 것이니 죄인의 징벌적 죽음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죄인의 역할로 죄인을 대속한 고난임을 구분해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멸망의 죽음이 전가된 대표적인 희생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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