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또래 친구들과 소소한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 권을 목표로 돌아가며 책을 선정하고 2주마다 모여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배경도 직업도 가치관도 저마다 다른 각양각색의 렌즈를 거쳐 나온 이야기들을 나누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누군가는 숲을 볼 때 어떤 이는 나무를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나무가 품은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다.
가장 최근 책장을 덮은 책은 저명한 건축가가 공간의 미래를 그린 책이다. 코로나 이후 교육 공간의 미래, 거주 공간의 미래, 경제 공간의 미래를 예측한 목차를 따라가며 주제는 자연히 부동산으로 흘렀다. 부동산의 가치 상승이 물가 상승보다 훨씬 빠르다는, 돈을 벌려면 빚을 내서라도 부동산을 구매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자본의 논리와 효율적인 이해타산이 주가 된 대화에서 눈치 없이 흐름을 끊었다. 성경적 가치관에서 출발한 ‘토지 공개념’을 소개하고 왜 부동산 투기에 동의할 수 없는지 조심스레 의견을 나눴다. 낯선 의견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친구도, 신선하다는 반응도 잇따른다.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행간은 공익을 위해 내가 누릴 수 있는 투자 이익을 쉬이 포기하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 그리스도인은 굳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까. 편한 길이 주는 달콤함을 애써 외면하고 고난의 잔을 들어야 할까.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우리의 주요 스승이 되신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손해와 불편을 스스로 택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동산 시세 차익을 포기하고 투기에서 손을 뗄 수 있는 이유이고, 일회용품을 쓰는 눈앞의 편리함보다 창조세계를 지키기 위한 불편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다. 손해를 보며,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다. 함께 기쁨으로 손해보는 길을, 불편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