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1517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 및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했고,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됐다. 그러나 루터가 반박문을 발표하기 전 이미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체제를 비판하면서 성경 속에 숨겨진 진리를 증거하다가 고난당한 선구자들이 있었다.
지난 8일 열린 ‘2016년 가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는 ‘종교개혁의 여명:16세기 종교개혁의 성경적·역사적·신학적 배경’을 주제로 다뤘다. 서울시민교회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 정성구 박사(총신대학교 명예교수)는 종교개혁이 발생하기 한 두 세기 전의 선구자들의 활동과 그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끼친 공헌에 대해 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종교개혁의 새벽별 존 위클리프
14세기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는 로마가톨릭의 체제와 교황권에 도전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설교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앙의 척도이자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라며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사도적 교회, 곧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성구 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 세속권력과 교권 사이에 큰 갈등, 동서교회의 분열, 교황청이 일으킨 십자군 등으로 암울한 시대였다”며 “중세교회는 더이상 사도적이며 복음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신앙과 도덕이 몰락된 영적 타락 상태, 곧 거대한 공룡조직이 되어 국가 및 사회에서 부패의 온상을 조장했다”고 말했다.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회의 머리라고 자칭했고, 그 아래 있는 감독과 사제들은 면세를 요구하며 재물을 긁어모았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요로워지자 국가에서도 교회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이들은 점점 성적,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존 위클리프는 이런 가톨릭교회의 해악과 부패를 세상에 알리고, 성경의 핵심적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난 교황주의 및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 성직매매, 교황청의 횡포, 권력 남용 등을 낱낱이 비판했다.
위클리프는 또 일반 대중들이 복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당시 중세교회에서 사용한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 성경(Latin Vulgate Bible)으로, 오직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성경 번역자들을 처벌하던 시대였다.
‘성경만이 모든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며 모든 진리는 성경 속에 포함됐다’고 설교했던 그는, 대중들이 영어로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382년 마침내 위클리프는 최초로 영어 성경인 ‘위클리프 성경(The Wycliffe Bible)’을 펴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그의 필사로 번역됐지만, 영어 성경은 비밀리에 대중들에게 전달됐다.
영어 성경을 본 대중들은 복음에 눈을 뜨게 됐고, ‘인간의 구원은 교회의 전통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초라는 사실’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
‘여섯 가지 오류’ 항의문을 작성한 얀 후스
1373년, 체코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고, 마르틴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바톤을 넘겨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부모는 후스가 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길 바랐다.
그는 1390년 프라하 대학교를 입학해, 1393년에는 문학사를, 1396년 인문학 학위를, 1400년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했다. 그는 또 1402년 프라하 내 베들레헴 교회의 교구신부 및 설교자로 임명을 받는다.
얀 후스가 프라하 대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프라하 시와 프라하 대학교에는 위클리프의 필사본 자료들이 퍼지게 된다. 이 자료들은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던 프라하에 교회개혁의 방향 및 기초 교리들을 제공했다. 후스 역시 위클리프의 책자들을 접한 뒤 깨달음을 얻었고, 그 자료들을 체코어로 번역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후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며 “교회는 제도나 기구가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쳤다. 또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 하나님이 만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성구 박사는 “후스가 처음 설교를 할 때는 로마 가톨릭 교도들 역시 그의 교회 개혁 운동을 지지했지만 그가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부패를 비판하고 교리적 개혁을 설교하자, 가톨릭교회 당국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분노했으며, 설교를 금지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후스는 설교를 멈추지 않았으며, 1413년 ‘여섯 가지 오류’를 발표해 베들레헴 교회당 안쪽 벽에 부착했다.
그가 발표한 여섯 가지 오류는 △사제들만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한다 △사제들이 성도들에게 마리아, 성인들, 교황을 믿어야 함을 주장 △하나님이 아닌 사제들이 마음대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행위 △사제들의 뜻대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어떤 죄에 대해서도 파문할 수 있다 △사제와 주교들이 교회 안에서 성직을 합법적으로 사고 파는 것 등에 대해 낱낱이 비판했다.
결국 후스는 대주교와 교황에게 파문당했고, 1415년 7월 6일 화형 선고를 받아 순교했다.
정 박사는 “후스의 ‘여섯 가지 오류’가 프라하 베들레헴 교회의 안쪽 벽에 붙은 것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흡사한 종교개혁의 메시지”라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한 세기 전 후스는 종교개혁의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회개를 외친 설교자 사보나롤라
이탈리아의 개혁자인 사보나롤라는 어린 시절부터 생각이 많았다. 그는 일찍부터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 및 교황권의 전횡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했다. 결국 20대의 그는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들어가 7년 동안 견습 신부 및 예비설교 학생으로서 경건 생활과 학문에 열심을 쏟아부었다.
이후 도미니칸 교단은 그를 설교사로 파송했다. 사보나롤라는 설교 여행 중 북이탈리아의 브레스키아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게 됐다. 그가 수도원 생활을 할 때 가톨릭교회의 세속화와 향락에 빠진 대중들을 보면서 ‘교회의 도덕성 회복’에 갈급함을 느꼈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세속적 인문주의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다.
또한 그는 교회가 채찍을 맞고 새로워질 것이며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노릇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에 통탄했고 교회 및 세상의 부패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큰 방향을 일으켰지만, 타락한 성직자들은 그를 증오하고 미워했다.
정성구 박사는 “그의 설교는 지지자들의 성원으로 인해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사보나롤라가 외치는 회개의 설교가 때때로 성경 자체에 근거하기보단 인간의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는 일이 많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대중들에게 거침없이 회개를 촉구했고, 지위를 막론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평등함을 외쳤다. 당시 대중들은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그 인원이 너무 많아 집회 장소를 옮길 정도였다. 이처럼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개를 외친 사보나롤라 역시 플로렌스에서 처형을 당함으로써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정 박사는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 및 행위의 유일한 법칙임을 설교하다가 순교의 잔을 마신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와 같은 선구자들로 말미암았다”고 발제했다.
그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은 생명을 바쳐 순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던 ‘오직 성경’의 사상이 설교와 저술을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라며 “그들이 뿌린 씨앗이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열매를 맺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과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또 “16세기 종교개혁을 이해하려면 위클리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종교개혁의 여명을 살피는 것은 오늘날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정성구 박사의 주제발표가 끝난 후 각 분과별로 나뉘어 발표가 이어졌다. 3분과로 나뉜 발표에는 권태경 박사(총신대학교), 우병훈 박사(고신대학교), 문병호 박사(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김종희 박사(백석대학교) 등 총 8명이 각각 발제자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