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샘물] 눈구덩이 속 어머니 사랑, 십자가 사랑
상태바
[은혜의 샘물] 눈구덩이 속 어머니 사랑, 십자가 사랑
  • 신헌재 장로
  • 승인 2024.09.04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헌재 장로/서울우이감리교회 원로장로,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신헌재 장로/서울우이감리교회 원로장로,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우이동 둘레길을 걷다보니 응달진 골짜기마다 엊그제 온 눈이 녹지 않은 채, 거의 그대로 남아서 하얗게 쌓인 곳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삼각산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온 몸으로 맞으며 걷다가 문득 6.25 사변 무렵 후퇴하는 어느 미군 병사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눈구덩이 속에서 우는 아기와 그 아기를 제 옷으로 꽁꽁 싸매갖고 가슴에 안은 채 발가벗은 몸으로 얼어 죽은 어머니 시신을 발견했다는 실화가 떠올랐다.

그 눈더미 속에서 이미 빳빳하게 굳어진 어머니 시신을 부근 땅 속에 묻어주고는 그 옆에서 울어대는 아가를 들쳐 업고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아들로 삼았다는 어느 미군병사의 미담을 떠올리며 문득 생각해보았다. 지금 여기보다 훨씬 더 추웠을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혹설에 막혀 온 밤을 지새우는 동안 아기엄마에게 닥쳐온 두려움과 추위는 오죽했을까! 그러나 아기엄마는 그보다 들쳐 업은 아기가 얼마나 추울까에만 정신을 쏟았겠지. 그러기에 업은 아기를 제 가슴으로 옮겨 끌어안고는 그래도 춥다고 우는 아기를 보다 못해 겉옷을 벗어 주었겠지. 하지만 아기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감싸주려면 그것 갖고는 부족해서 속옷까지도 벗어서 감싸주었겠지. 그러다보니 자신은 알몸이 되고 살을 에는 혹한이 온몸을 파고들었겠지만 엄마는 그보다 아기만 춥지 않게, 그래서 얼어죽지만 않게 하는 데만 온 마음을 쏟다가 그만 세찬 겨울바람과 시린 눈 속에서 알몸이 서서히 얼어가는 것도 모르다 죽어 갔겠지….

그래도 그렇지, 맨살을 에이는 삭풍의 매서움은 오죽하며, 내려퍼붓는 눈의 한기는 또 오죽했을까! 하지만 아기 엄마는 아기가 조금이라도 춥지만 않다면 그래서 얼어죽지만 않는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그 뜨거운 사랑 때문에 폭설의 긴 겨울밤을 알몸으로 버텨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자신은 얼어죽었지만 품속의 아기는 살려냄으로 목적을 이뤄 내지 않았던가!

위 일화는 그러고서 이삼십 년 후 어느 겨울날, 이미 청년이 된 아들이 양아버지 손에 끌려 엄마의 무덤에 찾아 와서 자초지종을 듣고는 눈 쌓인 엄마 무덤의 눈을 밤새 쓸어내며 “어머니, 그날 밤 얼마나 추우셨어요!”하며 오열했다는 후일담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이 후일담을 음미하면서 산책하다가 마침 멀리 교회 십자가를 보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눈 속의 엄마가 자기 목숨을 바쳐 아기를 살려냈듯이, 우리 예수님도 바로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해내신 게 아닌가 하고…. 그 눈 속의 엄마가 삭풍의 매서운 회초리도 피하게 하려고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대신 온몸으로 막아내주었듯이, 우리 주님도 저 냉혹한 군사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우리가 맞지 않도록 대신 맞아주지 않으셨던가 하고…. 눈속의 엄마가 아기를 혹한으로부터 얼어죽지 않게 하려고 제 옷을 다 벗어서 감싸주느라 알몸이 되었듯이, 주님도 우리 죄 값을 치르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겉옷을 다 벗은 채 알몸의 수치까지 감내하지 않으셨던가 하고….

그러다 문득 생각하니 그 이야기의 후일담에 나오는 그 아들은 그 자리에서 꿇어앉아 그날 밤 얼마나 추우셨냐고 오열했는데, 나는 과연 주께서 십자가 가는 길의 그 채찍과 벌거벗음의 수치를 당하심을 얼마나 내 아픔으로 받아들였던가, 그동안 그렇지 못했던 점이 새삼 부끄럽고 죄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세 되신 어머니는 지금도 예수 십자가 달리시던 고난주간 성금요일이면 온종일 금식해오셨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루 금식은 과하니 아침 한 끼 금식 정도로만 때워온 것이 새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올부터는 어머니 본을 받아 나도 종일 금식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며 주의 깊은 사랑에 잠겨보리라는 다짐을 새삼 해보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