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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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8.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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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⑳ 한국인이 잊어선 안 될 ‘호머 베절릴 헐버트’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취조 중이던 일경으로부터 뜬금없이 질문을 하나 받는다. 암살 배후를 캐묻던 중 미국 사람 ‘헐버트’를 아냐고 물은 것이다. 일본 통감부 기밀문서에 담겨 있는 안 의사의 답변은 이랬다. “나는 헐버트를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조선인이라면 단 하루도 그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안중근은 왜 그렇게 답변했을까.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1949년)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이 땅의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일제로부터 추방당하고, 쫓겨나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기도와 소망대로 생의 마지막을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마무리하고 이 땅에 묻혔다. 

처음은 육영공원 교사로 
헐버트는 미국의 한 신앙의 명문가에서 나고 자랐다. 헐버트는 다트머스대학과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86년 6월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은둔 땅 조선에 대해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1884년 아버지의 친구이자 미국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던 존 이튼(John Eaton)이 조선에 파견할 교사를 모집할 때 자원했다. 조선 정부가 요청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해 무산됐다. 다시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잘 준비하고 있었던 헐버트는 조선으로 가겠다고 나섰고, 1886년 7월 5일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해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국이 세운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에서 23세 미국 청년은 영어와 지리를 가르치고 자신 역사 조선 말과 글을 배우는 데 힘썼다. 

언어적 감각이 뛰어났던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눈을 떴다. 1889년에는 한글로 쓴 최초의 지리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할 정도로 뛰어났다. 사민필지는 선비와 백성이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국어사적 가치도 뛰어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헐버트는 책 서문에서 “한글이 중국의 한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필자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한글로 세계 각국과 지리와 보고 들은 풍속을 기록하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헐버트는 미국 잡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기고하곤 했을 뿐 아니라 1896년 독립신문 창간에도 기여하고, 영문판 편집까지 직접 맡았다. 최초로 한글의 띄어쓰기를 제안하고, 구전 아리랑을 채보해 전 세계에 처음 소개한 인물도 헐버트였다. 

추방된 후에도 조선을 위해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선교지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헐버트는 달랐다. 일제의 조선 침탈의 부당함에 대해 적극 의견을 피력했고, 조선을 위해 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고종의 불침번을 자처하면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고종은 1905년 10월 일제의 부당함을 미국 정부에 알리도록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하기까지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애썼지만, 미국 정부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고종의 밀서는 의미가 없다며 외면했다. 헐버트는 고종이 직접 서명하지 않은 조약이라고 호소했다.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체결한 미국이 끝내 비겁하게 나오자 헐버트는 고국을 맹비난한다. 

헐버트는 다시 한번 국제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시도한다. 1907년 이번에도 고종의 부탁을 받고, 네달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명을 도왔다. 일제의 감시가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 프랑스 등을 돌며 주의를 끌었고, 특사들은 무난히 헤이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일제는 헐버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결국 강제퇴거명령을 내렸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해 회중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38년 동안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대한 독립을 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발표할 ‘독립청원서’를 여운형과 함께 작성했다.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과 함께 파리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지 글을 미국 언론들에 기고했다. 1942년에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조직한 한미협회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1949년 7월 광복절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헐버트 선교사는 일주일 후 주님 품에 안긴 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삼문출판사에서 문서선교 감당
헐버트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더 주목받지만, 그는 분명 선교사였다. 육영학원 교사 생활을 마치고 1891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1893년 이제는 미국 감리교의 공식 파송을 받아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된다. 그는 당시 이 땅의 문서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유일한 기독교 출판사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의 사장을 맡았다. 한글학자 주시경도 배재학당을 다니며 학비를 벌던 곳이다. 삼문출판사는 교리와 교파를 떠나 신앙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과 잡지, 신문을 발간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에도 관심이 커 거듭 공부해온 헐버트는 ‘한국평론’을 창간하고 1901년부터 1904년까지 4년에 걸쳐 조선 역사에 대해 연재한다. 1905년에는 단군시대부터 고종시대까지 역사를 망라한 ‘한국사’를 고종의 윤허를 얻어 영어로 출간했다. 1906년에는 ‘대한제국의 종말’을 출간해 조선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침략 세력 일본 제국주의를 맹비난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를 맡은 것과 동시에 동대문교회(당시 볼드윈예배소)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1906년 현 노량진교회가 창립될  때 예배를 인도했던 인물도 헐버트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 한국YMCA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고 1903년 10월 창립총회에서는 의장으로서 YMCA 출범을 선언했다. 이승만, 서재필, 주시경 등 민족지도자들은 헐버트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6살 아들 묻힌 양화진에 안장
이 땅에 추방당할 당시 청년이었던 헐버트는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앞두고 미국 해군 배를 타고 이 땅을 다시 밟는다. 40년 만에 돌아온 당시 나이는 86세. 노구의 몸으로 한달 넘는 항해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미국에서 승선을 앞둔 그에게 AP통신 기자가 귀국 소감을 물었다. 헐버트는 그 유명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답변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헐버트는 대한민국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눈을 감고 말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마친 헐버트는 1897년 6살 나이에 먼저 주님 품으로 간 아들 곁,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안장된다. 

1950년 3월 정부는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 건국훈장 태극장을 헐버트에게 추서했다. 2014년 한글날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며 한글 발전에 대한 그의 역할을 기념했다.헐버트가 별세한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 채 남아 있던 묘비에는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 ‘헐버트 박사의 묘’가 50년 만에 새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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