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자녀로 방황,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
꾸준한 성장과 나눔, 이제는 목회 2기로
목포 만백성교회 민예성 목사는 체격이 큰 편이면서도 온화한 인상과 부드러운 말솜씨를 보여주곤 한다. 적당히 섞여 있는 전라도 사투리가 전하는 어느 정도 투박함은 사람을 정겹게 한다.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서 훈련시킨 결과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란다.
목회자의 자녀로 성장하면서 방황의 시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민예성 목사 역시 인생의 굴곡이 있었다. 거친 풍랑 속에서 겪은 고난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인생의 목표가 없던 시간을 지났던 경험은 이제는 또렷하게 목회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신학교 진학? 네가 왜?”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매 끼니 라면을 먹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 아들이라고 목회자 수준의 윤리적 기대를 하는 것이 부담이었고, 교회 안 온갖 봉사를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죠.”
친구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다반사. 당시 친구들 중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민 목사의 청소년기는 거칠었다. 한번은 친구가 다른 학교 학생에게 폭행을 당하자 복수하겠다며 통학버스로 몰려갔다. 민 목사가 채 버스에 오르기 전 먼저 탑승했던 친구가 흉기에 난자당한 적도 있다. 수도 없이 가출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어머니 말에 순종했던 기억이 있다. 서울로 가출하기를 결심하고 “서울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다시 폭행에 연루되었던 친구들 중 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친구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혼자 서울로 가지 않았던 민 목사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자신을 인도하신 것을 느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던 그는 신학교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학 상담할 때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더니 담임선생님의 첫마디가 ‘왜?’였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도 있고 해서 떠밀리듯 간 것이죠. 지금도 가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술에 잔뜩 취해 전화합니다. 내 친구 중에 목사님이 있어서 진짜 자랑스럽다고요. 당시 친구 중 한명은 제게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 집사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택한 그릇’ 글자가 가슴팍에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덕인지 믿음의 뿌리는 내려져 있었다. 신학교 재학 중 입대하면서 민예성 목사는 한 가지 다짐한다. “두들겨 맞더라도 반드시 주일성수는 한다.” 운전병 보직을 받아 교회 가기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집사인 상관을 만나 지프차 운전을 하게 된 것도 은혜였다. 보통 운전병으로서는 쉽지 않은데, 대대 군종병으로 차출돼 교회 안에서까지 섬길 수 있게 됐다.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미래를 깊게 생각했었죠. 어느 날 사도행전 말씀을 읽고 있는데, ‘택한 그릇’이라는 큰 글자가 프리젠테이션 할 때 나오는 효과처럼 가슴팍에 날아와 꽂히는 겁니다. 내 나름대로는 참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떠밀리듯 신학교에 갔지만 이제 그는 제대로 목회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는 계기였다. 군대 환경에서도 돕는 손길들을 참 많이 붙여주셨다. 자신 역시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부대에서 회식을 할 때면 다른 병사들을 배려해 12시간 밤샘 근무를 자처하기도 했다. 물론 술 취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마지노선을 지키겠다는 뜻도 있었다.
“목포로 가는 게 두려웠어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 안양, 서울에서 부교역자로 훈련받던 민예성 목사가 고향으로 다시 향하게 된 것은 12년이나 암투병 중이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췌장, 식도, 폐까지 전이되면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게 될 때 청빙을 받게 된 것이다.
“목포로 내려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릴 적부터 저를 봐온 성도들이 제 인성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대인관계가 좋은 것도 인정해주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35살 첫 담임 목회자 됐을 때는 자신감도 넘쳤다. 그의 표현대로 금방 몇 백명, 몇 천명으로 부흥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목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처음 몇 년은 목회가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했다고 민 목사는 떠올렸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곤 했죠. 어느 날 하나님께서 ‘민 목사야! 목회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란다’ 하는 음성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인 숫자와 재정 결산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이후 지금까지 목회가 얼마나 재미있는지요. 언제든 저는 목회할 겁니다.”
첫해 100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던 선교비는 지금은 3천만원으로 늘었다. 최소한 결산의 십일조는 선교비로 쓰자고 했을 때 회의적이었던 교인들도 이제는 당연히 결산의 10%는 선교비로 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의 특별한 기쁨은 다음세대가 성장해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부임 이후 각별하게 훈련시켰던 다음세대들이 지금은 목회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있다.
민예성 목사는 “하나님께서 뜻을 주셔서 3년 동안 강단에서 자면서 건축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 3년이 딱 지나자마자 부지를 허락하셨고, 순조롭게 건축을 마칠 수 있었다”면서 “20년 정도 대출 상환을 계획했는데, 코로나 기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감사”라고 들려주었다.
“백석이어서 좋습니다”
민예성 목사는 2015년 교단 통합 당시 백석의 가족이 됐다. 그는 백석 안에서 목회하는 것이 너무 좋다고 고백한다. 백석총회 인지도 덕에 지역에서 목회의 순조로움도 경험하고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민예성 목사의 특별한 감사는 군목으로 사역하게 될 아들 민진우 목사이다. 백석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군목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 아들은 실은 군 면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군 선교 사역을 위해 재검까지 받으며 입대를 준비 중이다. 백석 가족으로 함께 목회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부푼 마음이다.
아내 신영경 사모는 목포극동방송 간판 프로그램 ‘소망의기도’를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다. 청취자 중에서 신 사모가 백석 교회의 사모라는 것을 알고 등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민 목사에게 아내는 최고의 목회 동료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전도특공대를 5년 맡았다가 실패했는데, 소통 능력이 뛰어난 아내가 맡은 후에는 대성공입니다. 처음에는 부담을 내려놓고 마음껏 놀라고 했어요. 곧 심방과 전도사역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은 여러 테마를 정해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아내와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민예성 목사에게도 목회 2기가 찾아왔다. 앞으로 2가지 비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성도들의 노후를 교회에서 보장할 수 있도록 ‘행복의 집’을 운영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해외 선교지에 선교센터를 운영하는 것이다. ‘행복의집’을 위해 폐교된 중학교를 매입해 두었고, 선교센터는 1~2년 재정을 아끼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가 외부 집회를 인도할 때면 ‘벧세메스의 암소처럼’을 주제로 간증합니다. 외양간에 남겨진 송아지 같았던 제가 이제는 부모님처럼 벧세메스로 걸어가고 있네요. 그 길을 걷는데 우리 만백성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응원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