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전 호주 장로교가 파송한 가장 탁월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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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전 호주 장로교가 파송한 가장 탁월한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12.1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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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㉖ 개척자이자 교육자로 38년, ‘겔슨 엥겔’

“호주장로교회는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한 이래 해방 이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 중 가장 유능하고 지도적인 인물은 겔슨 엥겔이었다.”

오랫동안 영남지역 선교 역사와 호주장로교회 선교 사역을 연구해온 역사신학자 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는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8~1939, 한국명 왕길지) 선교사를 매우 유능하고 출중한 사역자로 평가했다. 독일 태생이면서 호주장로교 파송을 받아 조선에서 사역한 독특한 이력의 선교사, 바로 겔슨 엥겔이다. 

조선 사역 초기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어릴 적부터 교육에 관심이 컸던 그는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강단에서 일생 동안 주님의 뜻을 이루어갈 인재를 양육하는 데 힘썼다. 특히 그는 언어 습득 능력이 빼어났다. 조선에서 38년 동안 사역했던 겔슨 엥겔 선교사에 대해 살펴본다. 

독일에서 조선으로 오기까지 
엥겔은 1868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주에서 출생했다.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4세 때 사망한 후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했만, 독일 남부 경건주의 배경 아래 신앙을 키울 수 있었다. 아버지 같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엥겔은 사범대학을 다녔다. 대학 재학 중 1815년 설립된 바젤선교회 주최 선교대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1889년 스위스 바젤선교회 선교사훈련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신학교육을 받았고, 1892년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그리고 처음 파송된 곳은 조선이 아니라 인도 서부지역 푸나(Poona)였다.
1894년에는 호주감리교회 출신 클라라 바스(Clara Bath)와 결혼하면서 감리교 선교부 소속으로 적을 옮기게 됐다. 푸나지역 테일러고등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면서, 어릴 적 교사가 되겠다는 꿈도 이루어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시련이 찾아왔다.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면서 인도 선교지를 떠나야 했던 것. 엥겔은 고국으로 가는 대신 아내의 나라 호주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30년 이상 사역하겠다고 했던 각오는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호주에서도 지역 고등학교 교장으로 살던 중 조선으로 파송할 사역자를 찾던 빅토리아장로교회와 연이 닿는다. 그리고 선교사로 다시 사역할 것을 자원하게 된다. 

조선에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여전도연합회는 남녀 선교사 간 갈등이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고 선교의 탄력을 더할 선교사가 필요했다. 엥겔은 적임자였다. 선교사 경험이 있는 데다 목사안수를 받은 남성으로 사태를 수습할 능력도 갖췄다. 여전도연합회가 파송한 유일한 남성이 바로 엥겔이었다. 

엥겔은 1900년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멜버른 항구를 떠나 마닐라, 홍콩, 일본을 경유해 부산항에 도착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불과 사흘 만에 본격적으로 ‘김 서방’이란 인물로부터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중심 교회 개척·관리
호주 파송 여선교사들이 모여 드리던 주일예배가 발전해 1901년 부산진교회가 세워진다. 겔슨 엥겔은 부산진교회에 거점을 두고 사역에 매진한다.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지역 교회를 돌보는 사역에 힘썼다. 호주 출신으로 부산 경남에 가장 많은 교회를 개척했던 아담슨 앤드류(손안로) 선교사가 경남지방 서부를 맡았다면, 겔슨 엥겔은 울산, 기장, 서창, 언양, 병영, 울산 등 동부지역을 책임졌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겔슨 엥겔은 조선 사역 초기부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담을 협의했고, 호주 장로교는 경남지방 남서쪽을, 북장로교가 경남동부지역에서 사역하기로 분할에 대해 협의했다. 수차례 조정이 이뤄질 때마다 겔슨이 역할을 했다. 1913년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남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전체 사역을 관장하게 됐다.

엥겔은 정덕생, 박성태 등 조사와 함께 순회 전도를 벌였고, 여러 교회를 개척해 관리와 치리를 책임졌다. 1905년 동부교회, 1906년 함안 부봉리교회와 백산리교회, 함안읍교회, 1907년 갑을교회, 1908년 장전리교회, 금사리교회, 1909년 언양동부교회, 송정교회, 1901년 월평교회, 1911년 산성교회, 하단리교회, 1912년 평전교회, 신평교회 등을 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엥겔은 동래읍교회와 부산진교회를 담임하면서 동시에 지역의 교회들을 관리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에서 함께 사역하던 아내 바스가 귀국 후 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곧 귀국한 엥겔은 호주에 머물며 안식년을 보내야 했다. 이 기간 조선 사역에 대한 구상을 새롭게 했고, 부인의 친구이자 역시 선교사였던 아그네스 브라운과 1907년 결혼해 선교 사역을 이어간다. 

이밖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경상노회 노회장, 경남노회 노회장으로 사역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겔슨 엥겔은 6년간의 인도 선교사를 거쳐 호주 파송을 받아 조선에서 사역을 펼친다.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 선교에 매진하던 그는 평양에서 1938년 은퇴할 때까지 후학들을 양성했다. 사진은 엥겔과 수업을 들었던 평양신학교 학생들. 

탁월한 언어능력으로 교육
다시 시작된 조선 사역은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중심이었다. 1906년부터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해 겔슨 엥겔은 1년에 3개월씩 평양으로 올라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양신학교 사역은 그가 선교사 자리에서 은퇴해 귀국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엥겔이 신학교 교수진으로 합류한 것은 교육에 대한 역량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히브리어, 헬라어와 같은 성경 언어를 잘하는 등 언어에 대한 자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전 헬라어와 신약성경에서 쓰인 코이네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뿐 아니라 영어와 불어,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다. 인도 사역 중에는 현지 방언, 마라티어와 힌디어, 우르드어까지 섭렵했다. 조선 사역 초기부터 한글을 익히며 한자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아 공부했다. 이후에는 일본어도 독학으로 공부해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구약성경 개역위원으로 참여해 지지부진하던 성경 개정작업에 탄력을 받도록 선교사들과 협력했다. 1936년 개역 구약성경이 출간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찬송시 편찬에도 참여했던 그는 마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독일어 찬송가를 번역해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그 찬송곡이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이다.  

1906년부터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교육하던 그는 1919년에는 평양으로 완전히 이주한다. 엥겔은 신학교 학술잡지 『신학지남』 편집을 3년 동안 맡았고, 평양신학교 도서관장과 교회사와 성경언어 교수로서 섬겼다. 

한편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를 중심으로 설립된 숭실대는 꾸준히 교수 파견을 호주 장로교에 요청해왔다. 꽤 오랫동안 적절한 파견자를 찾지 못하던 차 호주선교부 연례회의에서는 1920년 평양에 살고 있던 엥겔을 교수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숭실학교는 일제 압제 속에서도 신앙교육을 멈추지 않았고, 엥겔은 그곳에서 성경과 기독교 강좌를 중요하게 가르쳤다. 

엥겔은 1937년 70세가 되어 선교사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숭실학교 교수로서, 이사진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해 3월 평양신학교 강당에서 환송예배를 드렸지만, 그의 공식 은퇴는 1938년 8월이다. 호주로 돌아간 그는 1939년 5월 멜버른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고, 두 번째 아내 아그네스 엥겔은 1954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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