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녀관’부터 ‘바퀴 달린 시약소’까지 46년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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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구녀관’부터 ‘바퀴 달린 시약소’까지 46년의 헌신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10.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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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㉔ 국내 감리교 최초 여성목사 ‘메리 커틀러’
메리 커틀러
메리 커틀러

“저녁과 아침은 차 근처 야외에서 요리해 먹었지만, 간단한 점심조차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상주 의사가 없는 마을에만 갔다. 큰 마을도 자동차 도로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차를 덮어두고 며칠에 걸쳐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걸어야 했다” -1926년 한국감리교여선교회 연례보고서 중.

글을 쓴 주인공은 미국 출신의 여성 의료선교사 메리 M.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 선교사로, 조선식 이름은 거달리(巨達里)이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국내 최초의 전용 순회진료 차량을 국내에 들여와 오지를 다니며 진료했던 과정을 기록했다. 무려 46년 동안 의술로 복음을 전했던 그는 한국 감리교회 소속 첫 여성 목사이면서, 여성 의료인을 양성하는데 앞장섰던 여성 사역자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환자가 있다면 언제나 진료
메리 커틀러는 미국 미시건주 커틀러빌에서 6남매 중 첫째 딸로 출생했다.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시건의과대학을 졸업해 전문의가 됐다. 미국에서도 여성이 의학을 전공하기 쉽지 않은 때였지만, 여성의 자립을 응원한 부친의 영향 아래 남녀공학 의대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의대에 다닐 때부터 선교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미국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WFMS) 파송을 받아 1893년 3월 서울에 입성했다. 

커틀러는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여성을 위한 의료기관 보구녀관((普救女館)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관이었고, 진취적인 커틀러에게도 딱 맞는 곳이었다.  

조선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보구녀관의 책임자는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였다. 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셔우드 홀은 커틀러와 같은 나이대이기도 했다. 셔우드 홀이 이듬해 5월 평양선교부로 옮기게 되면서, 커틀러는 보구녀관 3대 원장을 맡아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지게 된다. 

커틀러는 1893년부터 1912년까지 보구녀관에서 사역했고, 재임 기간 대부분 1인 의사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 간호 인력조차 거의 없던 탓에 늘 격무에 시달렸고, 조선인 보조는 제한적인 도움만 줄 수 있었다. 더구나 진료 외에도 여러 업무를 책임져야 했다. 그렇다고 환경을 탓하며 환자를 돌보는데 게으름을 피울 커틀러가 아니었다. 

커틀러가 사역하던 1897년 1,137회였던 보구녀관 진료 건수는 꾸준히 늘어나 1910년대에는 4,000건 이상이 될 정도였다. 왕진도 늘고 입원환자도 증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찾아다닌 커틀러의 헌신적인 사역 때문이었다. 

조선에 도착한지 3개월 후 산책 중이던 커틀러는 서대문 성벽 아래 한 사람만 들어갈 공간에 환자 4~6명이 사는 것을 보고, 곧장 의료기구를 챙겨가 달려간 적이 있다. 이후에도 한양 35리 밖으로 왕진을 가고, 1주일에 2~3회는 여성들이 있는 가정을 방문해 진료했다. 죽어가는 환자라면 가족이라도 길거리에 버리던 조선 사람들에게, 환자가 있는 곳 어디든 달려가는 커틀러가 심히 궁금했을 법하다.

포기하지 않았던 여의사 배출 꿈
커틀러는 여성들을 위한 의료진이 부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2년 안식년을 마친 후 복귀해서는 간호 선교사로 파송된 애드먼즈와 함께 간호학교를 시작한다. 미시간대학병원 간호학과를 졸업한 애드먼즈는 보구녀관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커틀러의 도움으로 간호학교 문을 열게 된 것. 커틀러는 간호학교에서 병원 예절, 환자 처치 기술 등을 가르쳤다. 간호학교 최초의 졸업생은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로, 커틀러가 집도한 수술 환자였다. 커틀러의 치료를 계기로 그들은 간호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커틀러는 여성 의사를 양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관 중심의 제중원과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병원조차 남성만을 학생으로 받고 있던 차에 커틀러는 여의사 양성을 추진한다. 파송 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해도 재정 탓에 응답이 요원했지만, 여의사를 양성한다는 목표는 흔들리지 않았다. 

커틀러는 항상 여성들을 위한 의학교육을 펼친 것이 특징으로 기록된다. 1905년 선교사 공석으로 동대문 볼드윈시약소를 책임지게 되고, 1907년 애드먼즈가 결혼으로 선교부를 떠나면서 간호학교까지 책임지게 된다. 커틀러는 비슷한 시기 조선인 여성 4명에게 의료교육을 시작한다. 

볼드윈시약소와 보구녀관을 통합하면서 ‘동대문부인병원’의 문을 연 후, 1912년 평양 광혜여원으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다시 로제타 홀과 함께하게 된 커틀러는 여성 의학강습반을 만든다. 조선 총독부의 의사규칙이 공표되면서 여성들을 위한 의료교육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감리회 요청으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서 여학생들의 청강이 가능해지기도 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강습소가 개편되고, 1925년에는 돌연 여성 청강을 거부하기도 했다. 여성 의료교육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커틀러의 꾸준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사 배출의 꿈은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만들어지면서 이뤄졌다. 

메리 커틀러는 46년 동안 조선에서 의술을 펼친 의료선교사이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쓴 복음전도자였다. 사진은 커틀러가 1925년 미국에서 들여와 개조한 조선 최초의 순회진료차량.
메리 커틀러는 46년 동안 조선에서 의술을 펼친 의료선교사이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쓴 복음전도자였다. 사진은 커틀러가 1925년 미국에서 들여와 개조한 조선 최초의 순회진료차량.

‘위생교육 예수교진찰소’ 타고
커틀러는 1925년부터 1939년 조선 사역을 마무리할 때까지 순회 진료사업을 전개했다. 1922년 안식년을 다녀온 그는 1925년 11월 순회진료 트럭과 함께 평양으로 복귀한다. 병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현실을 고려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서민들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물론 순회진료를 처음 실시한 선교사는 아니지만, 포드사의 전용 트럭을 타고 순회한 의사는 커틀러가 처음이었다. 

트럭은 경성에서 진료에 맞게 개조했고, 차량 옆면에는 ‘위생교육 예수교진찰소’(衛生敎育 耶蘇敎 診察所)라는 글자를 한글과 한자로 새겼다. 커틀러의 차량에는 운전기사, 전도부인, 조선인 간호원이 함께 탑승하고 환자를 찾아 다녔다. 60대의 나이가 되었지만 커틀러는 진료소 인가를 받고 진료 차량을 위한 운전면허까지 취득했다.

커틀러는 이를 ‘바퀴 달린 시약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첫해에만 2,100마일을 다니며 평양 주변 28개 마을을 찾아가 2천명을 진료하고 7천여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1935년까지 10년 동안 커틀러는 각지를 다니며 진료하고 약을 나누어주었다. 가는 곳마다 중증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보고서를 보면 기존 여성병원에서 진료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환자의 수를 진료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평양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차량에 태워서 오기도 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위생 교육을 실시하고 때로는 영화를 상영하거나 계몽교육을 펼치기도 했다. 한번 순회진료를 경험한 마을은 재방문을 요청하기 일쑤였다. 

커틀러는 1935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에서 공식 은퇴한다.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에서 동료 여선교사 13명과 함께 양주삼 총리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은 바 있는 커틀러는 1939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독립적인 사역을 펼치기도 했다. 조선 감리회 최초의 목사라는 기록도 남겼다. 커틀러는 재산을 모두 이웃에게 나눠주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1948년 4월 사망한 후 자신의 고향 커틀러빌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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